Solo

※ 전시와 관련된 작가의 글은 Artist's note 페이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9 기억공작소전 <흔적-비실체성 Kim, seoung-ryong>

2019.01.17 ~ 03.31
봉산문화회관 2층 4전시실(대구 중구)

글  | 정종구 봉산문화회관 큐레이터

예사롭지 않다. 전시장 입구의 천장 높이 벽면에 걸린 어두운 색 부엉이 그림 ‘새벽’이 그렇고, 조금 더 안쪽의 정면 높은 벽에 걸린 3점의 그림, 날렵한 날개와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매를 품으며 꿈틀거리는 나무와 숲과 바다를 그린 ‘새벽’, ‘바농오름-깊은 잠’, ‘공의 뜰’이 그렇다. 그 좌측 벽면에는 숲의 정령이 흰 비둘기를 안고 왼손을 쳐들어 주문을 외는 그림 ‘숲의 사람’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면 해골무늬 표피의 표범이 석류나무가지 위를 걷고 있는 그림 ‘섯알오름’과 그 좌측으로는 발기한 고흐가 해골을 품은 숲을 바라보고 있는 ‘반 고흐의 숲 2’가 그렇다. 그 아래에는 섬세하고 연약한 감수성의 ‘소년’ 그림이, 그 우측에는 발광하는 노랑 빛을 배경으로 몸속의 혈관이 나뭇가지처럼 뻗어 숲으로 확장하는 듯한 ‘반 고흐의 숲’이 그렇다. 여느 그림과는 아주 다른 그림들이다. 심미적審美的 재현再現이기 보다는 몽환夢幻처럼 초현실적인 심상의 사실적인 서사敍事를 떠올릴만한 비실체성의 생생한 흔적으로서 회화이며, 이 회화들은 비실체성非實體性, 정령精靈, 기운 등을 온몸으로 전율하게 하는 구조構造로서 김성룡이 생각하는 리얼리즘 혹은 초이성적 경계를 넘나드는 동시대미술이다.
 
김성룡은 필기구인 유성 볼펜을 이용하여 형상 이미지를 집요하고 정밀하게 그려온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몇몇 알려진 평문을 통하여 작가의 독자적인 시각과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김종길에 의하면, 김성룡은 “현실이라는 리얼리티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부조리한 세계의 찰나를 붙잡으려는 세계 인식을 통하여 슬픔, 공포, 죽음, 어둠의 색채들로 구성된 회화들이 기쁨, 환희, 삶, 빛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했으며, 강성원은 “김성룡 작업들의 주된 예술적 계기들은 오욕汚辱에 의한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잃어버린 생의 신화화를 통해 개인의 역사의 서기瑞氣들에 대한 동경을 회복시키고자하는 의지에서 출발한다.”고 했고, 고충환은 “김성룡의 그림에 나타난 폭력성은 그 실체가 희미하기만 한 존재의 심해를 건너가는 도구이자 무기다. 작가의 그림은 그대로 그 심해 한가운데서 만난 풍경을 현실의 표면 위로 길어 올린 것이다.”고 했다. 또 이영철은 김성룡의 작업에 대해,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도화선으로서 존재의 폭력성과 자연의 마성魔性을 언급하며, “예술의 인습적 역사 너머 초 이성의 공간을 걷고 있는 작가의 그림 속에는 과거에 겪었거나 현재 자신을 심부에서 휘젓는 어떤 것이 숨 쉬고 있다.”고 그 태도를 평한 바 있다.

 독자적인 태도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관습적인 회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작가의 형상 이미지는 기이한 상상력으로부터 분노와 좌절, 고통과 절망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 내면의 시적이고 영적인 감성들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또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지금 내 눈앞에 놓여있는 장소에서 그 형태를 본다는, 시선의 집중적이고 완고한 정신적 비물질적 의미는 시선을 존재론적 사유의 비실체적 세계의 경계 너머까지 걷게 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며, 이번 전시에 소개하는 ‘비실체성’에 관한 그림들은 산 것과 죽은 것, 현실과 비현실, 실체와 비실체의 몽환적 경계 상태에서 숲과 사물을 살펴보며 걷는 행위의 ‘흔적’을 통과하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석류와 표범이 그려진 ‘섯알오름’은 제주 4.3 사건의 아픔을 간직한 민간인 학살터에서 풍기는 비극적인 현대사의 서기 흔적과 더불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헤매며 어슬렁거리는 표범의 흔적으로 비유하여 그 넋의 비실체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바농오름-깊은잠’은 숲의 정령과 기운을 간직한 흔적들과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매의 자태를 통하여 비실체성을 드러낸다. 볼펜 선으로 그린 ‘숲의 사람’, ‘고흐의 숲’, ‘소년’ 등은 최소한 수만 번의 선을 그었던 편집증적인 신체 행위의 응집력을 통하여 회화적 성과를 넘어선, 인간 영혼이 연계하는 비실체성을 담아 생생한 날것의 이미지로 신체화 하려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고흐의 숲’ 연작은 순수 영혼으로서 인간 고흐와 그의 회화에 대한 경외심을 중심으로 정형화된 회화의 경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역사의 축으로 재편했던 비실체적인 힘에 관한 탐구의 흔적들이다.
 
 숲의 기묘한 징후들을 감성과 이성으로, 다시 초이성적으로 드러내려는 이번 전시, ‘흔적-비실체성’에서 김성룡의 미술행위는 공간의 틈새마다 느껴지는 푸른 공기의 흐름처럼 작가의 시선 속에 포착되어진 역사적, 신화적, 현재적으로 감도는 정령의 숨결 같은 대상들과의 조우로서 작동한다. 또한 김성룡의 숲은 자연과 이어지고 자연과 통하게 하는 비실체성으로의 통로이며, 인간의 초월적 영역에 관한 경외심의 또 다른 흔적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한 점의 그림은 그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자의 내부 속에서 들어간 채, 그 보는 자와 함께 하는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김성룡의 숲은 숲을 보는 자, 즉 관객에게 이미 체화해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관객은 초이성적이고 몽환적인 회화들로 인한 사실적인 시각체험을 통하여, 상상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관객 스스로 이미지에 대한 감수성과 의미와 힘을 발굴해내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기억공작소를 경험함으로써 예술에 관한 우리 자신의 태도를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갤러리청담 초대전 <검은 숲을 거닐다>

2014.08.08 ~ 09.21 
갤러리청담(경북 청도군)
※ 아래 도판은 전시 팸플릿에 수록된 내용이며, 팸플릿에 수록된 순서대로 게시했다.

김성룡전 : TRACE - IMMATERIALITY

2013.03.08 ~ 03.30
복합문화공간 꿀&꿀풀 (서울 용산구 한남동) 
※ 아래 도판은 전시 도록에 수록된 내용이며, 도록에 수록된 순서대로 게시했다.

김성룡展 <검은 회오리의 숲>

2009.08.21 ~ 09.18 
갤러리 아리랑(부산 해운대구)
※ 아래 도판은 네오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전시 작품만을 수록했다. 

※ 아래 도판은 온라인에 게시된 현장 사진을 통해 확인된 당시 전시된 작품이다.  

◼︎ 검은 회오리의 숲 | 김종길 미술평론가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은 2000년대 이후 새롭게 관심을 가진 주제들이다. 사실 그가 줄기차게 던졌던 화두는 '인간의 폭력'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제 그는 자연으로 눈을 돌려 그 폭력의 가면을 벗겨낸다. 심연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연에 관한 명상적 작품이 있는가 하면, 휴전의 내공으로 가장 아름답게 성장했으나 슬픈 영혼의 초상이 떠도는 DMZ의 초상도 있고, 더 이상 자신들의 삶터를 내어 줄 수 없어 이미 가파른 절벽에 다다른 동물들도 보인다. 이 동물들은 인간이 상실한 자연의 순수성 혹은 영성을 간직한 신령한 존재들이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독특한 지점을 형성하고 있다. 1980년대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1990년대를 거치면서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새롭게 실험하고, 2000년대에는 현실과 비현실,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리얼리즘의 미학을 독자적 경지로 끌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은 쉽게 판타지의 영역으로 휩쓸리지 않는 그의 견고한 미학적 정치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미학적 정치성은 여전히 '현실'이라는 아주 강력한 리얼리티이다.

◼︎ 가을과 변화하는 사물  | 제레미 에이커만 Jeremy Akerman

영국의 민간전설에는 'Green Man(녹색인간)' 이라는 신비한 인물이 전해 내려온다. Green Man이 누구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정학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을 상징한다는 것쯤을 알 수 있다. 길들여 지지 않을 자연의 힘, 정신, 그리고 야생성의 존재로서 말이다. Green Man 은 시공간적 한계를 뚫고 다양한 곳에서 등장한다 (영국에만 국한된 인물이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그와 유사한 인물이 전해온다). 아서왕 전설 (Legends of King Arthur)에도 나오고, 로빈훗 이라는 유명한 영웅의 모습으로도 등장하며, 또 영국의 선술집들은 그의 이름을 차용하기도 한다. 오늘날 Green Man은 지구보호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환경전사 (Eco warrior)들의 부적과도 같은 일종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부산의 한 작업실에서 김성룡을 만난 놀라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같은 건물에서 작업하기로 되어 있었던 점을 고려해 서로 일면식이라도 하면 좋을 것이라는 지인을 소개로 올 7월에 그를 만났다. 우리는 그의 작업실에서 인삼차를 마시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벽에는 그의 시리즈 작품인 'Autumn (가을)'에 등장하는 큰 인물 그림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부산한 작업공간을 압도하는 듯한 그림 속의 건장한 근육질의 남자는 당장이라도 우리를 덮칠 듯한 기세였다; 머리는 소용돌이치는 듯한 낙엽들로 덮어 있다. 한 손은 머리쪽 낙엽들을 꽉 쥐고 있고 다른 한 손의 검지는 지면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황소처럼 우람한 그림 속 인물과의 첫 만남은 다소 위협적인 느낌이었지만, 또 한편으론 집에서 5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생급스러울 만큼 익숙한 뭔가를 본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김성룡 회화展 <보이지 않는 신체>

2007.10.31 ~ 11.25
수가화랑(부산 동래구)
※ 아래 도판은 네오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전시 작품만을 수록했다. 

글 | 이영철 

폴 오스터에 따르면, 1940년대 후반 사무엘 베케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누구도 감히 실패할 수 없는 식으로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실패한 예술가들, 사무엘 베케트, 아쉴 고르키, 바스 얀 아더, 에바헤스, 엘리오 오이티시카, 첸젠, 박이소 등이 호흡했던 공기 입자들 중 일부를 들이마시고 있다. 호흡할 때마다 하늘의 입자 수백만 개가 몸 속으로 들어와 잠깐 데워진 다음, 다시 세상으로 흩어져 나간다. 생명과 물질이 만나는 어떤 곳에도 고요함은 없다. 공기는 항상 진동하고 불타오른다.

땅에서 시작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하늘은 두껍게 요동치는 영역이고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다. 산사를 찾아 헤매던 6년의 정신적 방황을 끝내고 다시 창작에 미친 듯이 몰두하던 그 열정적인 시간들, 극도의 신경쇠약과 환각에 시달리던 최근 2년은 자신의 머릿속에 갇혀 살았다. 자신의 뇌 속에 닫혀지는 경험은 오직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어떤 것. 그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이다.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그는 더욱 깊이 다른 사람들, 다른 것들과의 깊은 연결을 느끼게 욕망하였다. 숲과 하늘은 삶의 시각적 상수(常數)이고, 우리의 모든 모험과 사고, 감정의 복잡한 배경이다. 하지만 인간인 까닭에 인간이 그립다.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을 이파리를 주워 작가는 자신의 눈을 가린다. 베케트가 말하는 실패는 세속적인 성공의 반대어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항상 해체해 가며 강인하게 지속하는 실천적 깨달음을 지칭하는 "삶-의-형태"(지오르지오 아감벤)를 가르킨다. 그것은 안으로 타들어 가는 탄화된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거나 강도 높은 내면적 뒤틀림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세속적 성공을 기대하다 무너지는 통속적인 패배주의나 염세주의와는 시작부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삶 안에서 '삶 자체'를 항상 의문시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는 자에게 헌정된 실패를 가르킨다. 15년 동안 그의 그림들을 지켜보면서 김성룡은 그러한 실패의 영역으로 걸어 나가는 용기있는 미술가로 보인다.

그가 볼펜으로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영혼은 곤경스런 삶의 계곡 속에서 본능적으로 실패의 냄새를 맡았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따라서 한번도 현실적 차원에서 긴급함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긴급함은 권력의 용어다. 권력은 긴급 상태 외에 그 어떤 다른 형태의 정당화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늘상 긴급 상태에 호소하고, 암암리에 그러한 상태를 창출해 내려는 수단들을 만들어 유지된다. 그런 습성에 길들여진 작가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실패자를 속으로 시기하고 경멸하는 버릇을 키우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은 전 세계적으로 도처에서 긴급 비상 상태에 처해 있고 작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주하게 달리거나 어쩌지 못한 채 멈춰 서 있다. 하지만 답은 없다. 어떤 답도 결코 우리를 온전히 담을 수 없으며, 답들은 어떤 권력의 형태를 예비한다. 긴급 사태에서는 답도 질문도 아닌 그 중간적인 협잡이 늘어간다. 반면 질문은 비권력의 상태이다. 그것은 일종의 배반이다.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어떤 것들. 예를 들어 바닥이 한없이 꺼져버린 어떤 상태, 어떤 무자비한 공허, 무력하게 마주해 있는 보르헤스의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김성룡은 "누군가 이치를 깨달을 때 지옥의 입구에 서 있는 허무와 직면하게 된다"고 말하다.

그는 일찌감치 세상의 바닥을 보았다. 황무지 같은 도시 거리에는 '포식자'가 넘쳐흐르고, 도시는 잔인함이 넘쳐흐르는 정글이다. 우리의 '본능'은 날카롭고 필요할 때면 서로를 사냥감으로 선언하고 덤벼든다. 하지만 그것은 바깥에서 도래하는 폭력성의 일부일 따름이다.

그는 이런 말을 적어 놓고 있다. "모든 폭력은 세상의 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들은 현실의 장막을 찢으며 존재가 드러날 때의 날카로운 야수적 이빨, 존재의 폭력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것들은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도화선이다.

보자마자 우리 시선의 기계적인 접촉은 전기적인 에너지로 재빨리 변환된다. 보는 이의 근육은 긴장하고 신경은 더 많아진다. 그림을 좀 더 반복하여 볼수록 다양한 선들이 꿈틀거리며 춤을 춘다. 예리한 선들은 천천히 속력을 내다 때로는 돌풍처럼 몰아치기도 하고 때로는 불규칙적인 파선을 형성한다. 그의 작업에는 점은 없다. 점은 있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원, 마침표가 되어버린 점,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에서는 "신은 점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고 말한다. 신이 부재한 세계는 자연의 마성이 개입해 들어온다. 과거에 겪었거나 현재 자신을 심부에서 휘젓는 어떤 것이 그의 그림 속에 숨쉬고 있다. 회화적 표현의 전통적인 수단에서 불구하고 우리의 내부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그 외부의 힘들에 맞서, 그리고 예술의 인습적 역사 너머 초이성의 공간을 답사하려는 그의 고투에 찬사를 보낸다.

김성룡 회화展 <존재의 폭력, 초이성의 공간>

2007.5.11 ~ 6.9
와인바 갤러리 화수목(서울 강남구)
※ 아래 도판은 네오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전시 작품만을 수록했다. 

글 | 이영철

폴 오스터에 따르면, 1940년대 후반 사무엘 베케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누구도 감히 실패할 수 없는 식으로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실패한 예술가들, 사무엘 베케트, 아쉴 고르키, 바스 얀 아더, 에바 헤스, 엘리오 오이티시카, 첸젠, 박이소 등이 호흡했던 공기 입자들 중 일부를 들이마시고 있다. 호흡할 때마다 하늘의 입자 수백만 개가 몸 속으로 들어와 잠깐 데워진 다음, 다시 세상으로 흩어져 나간다. 생명과 물질이 만나는 어떤 곳에도 고요함은 없다. 공기는 항상 진동하고 불타오른다. 땅에서 시작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하늘은 두껍게 요동치는 영역이고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다.

산사를 찾아 헤매던 6년의 정신적 방황을 끝내고 다시 창작에 미친 듯이 몰두하던 그 열정적인 시간들, 극도의 신경 쇠약과 환각에 시달리던 최근 2년은 자신의 머릿속에 갇혀 살았다. 자신의 뇌 속에 닫혀지는 경험은 오직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어떤 것. 그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이다.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그는 더욱 깊이 다른 사람들, 다른 것들과의 깊은 연결을 느끼게 욕망하였다. 숲과 하늘은 삶의 시각적 상수(常數)이고, 우리의 모든 모험과 사고, 감정의 복잡한 배경이다. 하지만 인간인 까닭에 인간이 그립다.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을 이파리를 주워 작가는 자신의 눈을 가린다.

베케트가 말하는 실패는 세속적인 성공의 반대어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항상 해체해 가며 강인하게 지속하는 실천적 깨달음을 지칭하는 "삶-의-형태"(지오르지오 아감벤)를 가르킨다. 그것은 안으로 타들어 가는 탄화된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거나 강도 높은 내면적 튀틀림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세속적 성공을 기대하다 무너지는 통속적인 패배주의나 염세주의와는 시작부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삶 안에서 '삶 자체'를 항상 의문시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는 자에게 헌정된 실패를 가르킨다. 15년 동안 그의 그림들을 지켜보면서 김성룡은 그러한 실패의 영역으로 걸어 나가는 용기있는 미술가로 보인다.

그가 볼펜으로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영혼은 곤경스런 삶의 계곡 속에서 본능적으로 실패의 냄새를 맡았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따라서 한번도 현실적 차원에서 긴급함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긴급함은 권력의 용어다. 권력은 긴급 상태 외에 그 어떤 다른 형태의 정당화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늘상 긴급 상태에 호소하고, 암암리에 그러한 상태를 창출해 내려는 수단들을 만들어 유지된다. 그런 습성에 길들여진 작가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실패자를 속으로 시기하고 경멸하는 버릇을 키우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은 전 세계적으로 도처에서 긴급 비상 상태에 처해 있고 작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주하게 달리거나 어쩌지 못한 채 멈춰 서 있다. 하지만 답은 없다. 어떤 답도 결코 우리를 온전히 담을 수 없으며, 답들은 어떤 권력의 형태를 예비한다. 긴급 사태에서는 답도 질문도 아닌 그 중간적인 협잡이 늘어간다. 반면 질문은 비권력의 상태이다. 그것은 일종의 배반이다.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어떤 것들. 예를 들어 바닥이 한없이 꺼져버린 어떤 상태, 어떤 무자비한 공허, 무력하게 마주해 있는 보르헤스의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김성룡은 "누군가 이치를 깨달을 때 지옥의 입구에 서 있는 허무와 직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일찌감치 세상의 바닥을 보았다. 황무지 같은 도시 거리에는 '포식자'가 넘쳐흐르고, 도시는 잔인함이 넘쳐흐르는 정글이다. 우리의 '본능'은 날카롭고 필요할 때면 서로를 사냥감으로 선언하고 덤벼든다. 하지만 그것은 바깥에서 도래하는 폭력성의 일부일 따름이다. 그는 이런 말을 적어 놓고 있다. "모든 폭력은 세상의 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들은 현실의 장막을 찢으며 존재가 드러날 때의 날카로운 야수적 이빨, 존재의 폭력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것들은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도화선이다. 보자마자 우리 시선의 기계적인 접촉은 전기적인 에너지로 재빨리 변환된다. 보는 이의 근육은 긴장하고 신경은 더 많아진다.

그림을 좀더 반복하여 볼수록 다양한 선들이 꿈틀거리며 춤을 춘다. 예리한 선들은 천천히 속력을 내다 때로는 돌풍처럼 몰아치기도 하고 때로는 불규칙적인 파선을 형성한다. 그의 작업에는 점은 없다. 점은 있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원, 마침표가 되어버린 점,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에서는 "신은 점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신이 부재한 세계는 자연의 마성이 개입해 들어온다. 과거에 겪었거나 현재 자신을 심부에서 휘젓는 어떤 것이 그의 그림 속에 숨쉬고 있다. 회화적 표현의 전통적인 수단에서 불구하고 우리의 내부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그 외부의 힘들에 맞서, 그리고 예술의 인습적 역사 너머 초이성의 공간을 답사하려는 그의 고투에 찬사를 보낸다.

김성룡 회화展 <무의식의 날 것들>

2005.9.27 ~ 10.10
space HaaM(서울 서초구) 
※ 아래 도판은 네오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전시 작품만을 수록했다. 

◼︎ 무의식의 날 것들 | 고충환 미술평론가

유목주의로 널리 알려진 질 들뢰즈의 사유방식을 대변하는 말 중에는 정신분열증 분석과, 기관 없는 신체, 그리고 자기 발생적 사유의 개념이 있다. 먼저, 정신분열증 분석이란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가 그렇듯 모든 지식의 경계를 건너뛰는 사유, 모든 지식의 질적 차별을 등가치화 하며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횡단적 연계성의 사유를 말한다.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란 이러한 지식에 길들여지지 않은 의식, 마치 백지와도 같은 의식의 제로 지점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의식의 백지 상태로부터 진정한 자기 발생적 사유가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욕망의 지도(몸의 사유)로써 지식의 지도(정신의 사유)를 재 표기하고 재 영토화하기를 겨냥한 이 사유방식은 세계 읽기에 대한 재 독서를 요구한다.

김성룡의 그림은 심연 저 밑바닥으로부터 마치 악몽인 양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오른다. 의식의 그물에 붙잡히기를 거부하는 그것은 비록 육안으로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감각적 형상에도 불구하고, 실상 자궁 속의 태아처럼 무의식의 막 속에 가려져 있다. 마치 상상계와 상징계가 무분별하게 혼재된 실제계(코라)처럼 작가의 그림 속에는 지식의 안쪽으로 붙잡을 수는 없는 날 것들의 세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림 속의 이미지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함축한 서사의 한 형식으로 읽히는가 하면, 똑같은 이미지가 종교적인 삶에 대한 메타포로도 읽힌다. 역사는 귀신이 되어서 되돌아오고, 기계와 인간이 하나로 몸을 섞는다. 청춘의 아름다움이 그 등 뒤에 비수를 숨기고 있는가 하면, 평화로운 풍경 속에는 불길한 풍경이 내재돼 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의 의미는 언제나 겹 구조의 중첩된 형태로 오며, 마침내 그 의미로부터도 달아난다. 그리고 모든 결정적인 의미를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의미 속에 빠트린다. 그 의미는 흔히 지나치게 개별적인 나머지 공유할 수 없는 상징(개별상징)과 연결되며, 이로부터 유래한 생경함과 낯설음이 유목주의의 실천논리에 맞닿아 있다.

김성룡展 <흔적-비실체성>

2003.4.24 ~ 5.22
사비나미술관(서울 종로구)
※ 아래 도판은 전시 팸플릿에 수록된 내용이며, 팸플릿에 수록된 순서대로 게시했다.

김성룡展 <흔적 비실체성>

1999.12.4 ~ 2000.1.2
동백아트센터(부산 해운대구)
※ 아래 도판은 전시 팸플릿에 수록된 내용이며, 팸플릿에 수록된 순서대로 게시했다.

글 | 강성원 미술평론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 대학원 졸업. 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활발한 비평활동. 1999년 제4회 월간 미술대상에서 학술 평론 부문 대상 수상)

 김성룡 작품들의 독창성은 한국 화단의 현재 풍토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진귀한 현상이다. 이 시대의 그 모든 상품 미학적 대중매체의 인간 영혼에 끼치는 심대한 영향들에도 불구하고 김성룡 같은 예술혼이 온전히 짙은 계곡의 전설처럼 보존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인간 정신과 의지가 창조해낸 예술의 본원적인 영원성과 진보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구체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나날의 삶이 오욕의 삶일 수밖에 없을 때 김성룡의 예술혼은 상처입고 신음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작업들의 주된 예술적 계기들은 그런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잃어버린 생의 신화화를 통해 개인과 역사의 서기에 대한 동경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지에서 출발한다. 한국 화단에서 기념비적 예술혼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김성룡의 작품은 상황화된 사물과 풍경을 배경으로 구체적 개인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개인은 거의 유령화되다시피한 혼백만으로 존재한다. 그 개인은 서구적 의미릐 시민적 개인이 아니라, 현재의 한국인들의 의식의 근저가 되고 있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는 개인이다. 
 혼백으로 남아 역사를 전하는 그의 작품들의 주인공은 강산의 이곳 저곳, 마당 뒤뜰, 느릅나무 밑, 지붕 위, 도심 공간의 곳곳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실체를 증언한다.
 김성룡은 기존의 회화의 역사 취급방식이 개인을 배제한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나 사물의 의식 내용과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민족 개개인의 자기 정체성의 모양들을 통해 역사 해석의 신화적 형상력을 얻어내고 있다. 

◼︎ 유배된, 유폐된 자의 불온성 | 고충환 미술평론가
(영남대학교 회화과 및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졸업.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 평론 부문에 당선 후 활발한 비평활동)

피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목단꽃의 붉은 빛이 선연한 유월 한가운데 머리를 박박민 자화상이 윗도리를 벗어 젖힌 채 정면을 쏘아보고 있다. 풀어헤쳐진 바지춤이 설핏 보이는 잘려져 나간 화면의 아랫부분에서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음을 상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손아귀에 쥐어진 깨진 병조각으로 아버지의 무릎에 칼집을 긋는 ‘패륜이, 부랑이, 자기부정이 묻어있다. 패륜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을 건널 수 없다는 살의가 번득인다. 
 인물의 부드러운 살색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 목단꽃의 붉은 빛이 화면에 불안한 기운을 증폭시킨다. 그 자체로 불길하면서 화려한 부랑의 한 징후를 대변하고 있다. 불길하다 함은 무책임하고 예견할 수 없는 자아를, 비정형의,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 자아를 말한다. 화려하다함은 뿌리 뽑힌, 부유하는 자아의 자유를 말한다. 패륜은 자기의 또 다른 자아인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자기 부정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실감한다. 자기부정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무에 이를 때까지 자기를 밀어부친다. 그곳에는 더 이상의 륜도 패륜도 부랑도, 부정도 살생도 없다. 다만 먼지로도 생사를 거듭나지 않는 ‘허허롭기만한 공’이 있을 다름이다. 

김성룡은 감각적인 것, 곧 회화라는 수단을 매개로 자아를 지워나가는 일에 천착하고 있다. 감각 덩어리인 그림을 통해 자기를 지운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인가. 자아는 비감각이며 비실제이며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허구이며 허방이기도 한 그림으로 자아를 지운다는 것 또한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자아는 감각이며 실제이기 대문이다. 이렇듯이 뒤틀린 그림의 존재가, 감각의 현란한 표면인 그림의 존재가 그 자체로 허구이며, 허방이며, 아이러니이며, 환영이며, 악몽임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김성룡의 그림이 한바탕 악몽을 꾼 듯한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악몽이 아니고서는 자기를 지울 수 없다는 비장감이 핏발로 서 있다. 
 그냥 비현실이라기 보다는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 어딘가에. 실체와 비실체의 사리 어딘가에 떠도는 혼령들을 설핏 보여준다. 그 혼령들의 정체를 작가는 ‘흔적’이라는 말로 옮기고 있다. 아마도 모든 감각적인 실체란 사실은 실체의 흔적임을 지시할 것이다. 일체의 관념이나 사념 역시 이렇듯이 떠도는 혼령의 흔적에 비해볼 때, 온전한 육신으로 재현된, 육화된 관념이란 더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생산하지 못하는 뻣뻣한 주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변태(메타모르포제)와 불합리한 비현실을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재현해냄으로써 지상에 유배된, 유패된 자의 과대 망상증을, 정신분열증을, 실체 없는 불안을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변태는 작가의 불합리한 존재 인식을 반영하는 주요한 형식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작가는 자아는 죽은 혼령들이 떠도는 못 가에 망연히 넋놓고 앉아 있는 민영환으로, 세 갈래 뱀의 혓바닥을 널름거리는 오랜 기억처럼 희미한 황후로, 역사와 비역사의 경계를 옮겨다닌다. 뱀과 황후의 동일시가 자신으로서의 뱀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혀와 뱀의 혓바닥을 동일시한 또 다른 그림에서 변태는 유혹을 넘어 성적인 기호로 증폭되기도 한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쓴 채로 피를 흘리고 서 있는 예수의 형상에서는 죄의 삯인 피를 갈음하는 대속자의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온 몸에 주사바늘로 찔린 채 코피를 흘리고 있는 부랑아로, 속옷차림으로 어디론가 황급히 달아나고 있는 도망자로, 초현실적인 꿈을 잉태하는 알과 수수께끼로, 온통 핏빛으로 물든 하늘을 지나 한 걸음에 훌쩍 숲을 뛰어넘는 술 취한 거인으로, 용을 호리는 귀기어린 처녀로 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날개로 된 귀를 세우고 있는 몽상가로 실체와 비실체를 옮겨다닌다. 

 하얀 치아가 새알 같은 ‘누이의 곁을 지키고 있는 소, 주사를 맞고 청산에 길게 드러누운 채 널부러져 있는 소(등에 누군가를 태운 채 쓰러진), 누워있는 사람을 상기시키는 껍찔이 벗겨진 벗기워진 소의 몰골이 황후의 시해를 증언하고 있는 듯 생생하다. 이렇듯이 작가의 그림을 보노라면 어김없이 ‘날 것’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마치 밝은 분홍빛의 살갗과 파리한 정맥, 그리고 껍질이 벗겨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증언해주는 응고된 핏자국을 한 소의 주검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유일하게 살아있는 눈이 생경함을 더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변태는 이렇듯이 핏물이 뚝뚝 듣는 살벌한 자기부정을 통해 온갖 현실과 비현실을 이어주는 주요한 방법론이 되고 있다. 
 작가가 자기를 부정하는 긴 노정은 여타의 뜰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근작에서 좀 더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방법론으로 선회하고 있다. 자기 내부로부터 기인한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내성화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작가의 그림이 표면상의 비현실적인 인상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강도와 힘을 잃지 않는 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감각적인 현실 혹은 실체(단순히 현실 혹은 실체의 내용적인 국면과는 구분되는)와 연결된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섣부른 정의와 양식화 혹은 정형화된 화면 구성을 피하는 것 역시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강점이 되고 있다. 양식화 혹은 정형화된 화면이란 곧 회화의 죽음과 동격임을 알기 때문이다. 
 유례없는 작업인 볼펜화(가장 편집증 적인 기법이기도 한)와의 지루한 싸움이 단순한 회화적 성과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김성룡展

1999 ※전시 일정 및 세부내용 파악필요 
부산 범어사, 양산 통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