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2014.4 [MAPS MAGAZINE] 

2011.12 [성대신문] 날카로운 볼펜 끝 현실을 그리다

◼︎ 볼펜 화가 김성룡 씨 인터뷰 | 서준우 기자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의, 동물들의 생생한 눈빛이 매섭게 우리를 쏘아본다. 날카로운 볼펜의 필치로 내면의 아픔을 극도로 끌어올린 듯한 그 눈빛을 바라보자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볼펜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은 친절하거나 따뜻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이기에 쉽게 외면하지 못한다. 현실의 면면을 굴곡진 인생이 녹아든 감성으로 걸러내 화폭에 담는 화가, 김성룡 씨를 만나봤다.

서준우 기자(이하 서) 그림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김성룡 볼펜 화가(이하 김) 어렸을 땐 오히려 문학에 관심이 많아 글쓰기를 더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그림을 그리면서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집안 사정이 나빠졌다. 중학교 때부터 포장마차 일에서 집짓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가게에 걸린 그림이 시선을 끌었다. 옛 명화를 베껴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날따라 유달리 잘 그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득 나도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때부터 물감을 사서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잘 그려지더라. 그렇게 그림을 그려온 지 20여 년이 넘었다.

소녀, 종이에 혼합재료, 110 × 90 ㎝, 2009

서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김 볼펜을 집어든 것도 그림을 시작한 것만큼이나 우연이었다. 온종일 고된 일을 해 번 돈으로 틈틈이 그림공부까지 하려니 경제 사정이 좋지 못했다. 물감이 다 떨어졌는데 섣불리 다시 사야겠다는 엄두를 못 냈다. 그러던 중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볼펜을 주워들어 그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밑그림부터 채색까지 볼펜만을 이용한 사람은 당시엔 내가 처음이었을 거다.

서 최초가 되는 것,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김 지금은 볼펜을 쓰는 화가가 많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나뿐이었다. 선대의 사례가 없으니 참고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막막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오히려 그 막막함이 좋았다. 그림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 그림은 나의 전부였기 때문에 사소한 난관에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에 내가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볼펜을 이용하니 덩어리진 물감으로 표현된 기존의 서양화에서 느낄 수 없는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처음엔 기존 미술과 너무 분위기가 달라서인지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그런 반응이 있을 때마다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는 생각은 더 강해졌던 것 같다.

서 재료가 볼펜이기에 생기는 작업과정의 독특한 점이나 효과가 있다면

김 그림을 그릴 땐 유성 볼펜을 사용한다. 볼펜의 치명적인 단점은 한번 그리고 나면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정이 불가능한 만큼 볼펜이 종이에 닿기 전에 머릿속으로 구상을 완전히 마치고 화폭에 옮겨야 한다. 또 필기구로 적합한 작고 가는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자면 하루에 6~7시간 열심히 손을 움직여도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꼬박 한 달은 걸린다. 그렇지만 볼펜이 그리는 거칠고 날카로운 선만이 주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그림을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나의 의도와 볼펜의 거친 질감이 잘 맞는다. 100호 캔버스를 볼펜만으로 꽉꽉 채우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테이프를 칭칭 감아 볼펜을 손에 고정시키고 종이에 마구 휘갈기는 기법 자체가 즐거워져 버렸다.

등불, 종이에 유성볼펜 아크릴릭, 165 × 120 ㎝, 2009

서 볼펜만을 이용해서 그리는 것인가

김 최근에는 다양한 재료를 혼용해서 그린 그림이 더 많다. 성격 자체가 하나에 오랫동안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크릴 물감, 색연필 등의 재료를 사용해 그림에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고 회화와 별개로 판화 작업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물감과 같은 채색도구를 이용해 밑그림을 그리더라도 그 위에 볼펜의 필치를 더해 개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빠트리지 않고 있다.

서 작품의 분위기가 대체로 어둡고 낯설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김 처음에 그림을 그릴 때 한국의 근대사를 소재로 많이 그렸다. 일부러 어두운 분위기를 내려고 의도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 자체가 슬픔과 한을 많이 담고 있어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미술의 핵심은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려다 보니 아무래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잊혀진 일들을 주로 다뤄왔다. 말하고 나니 소재 자체가 밝은 분위기를 내기엔 어려운 것들이다. 어둡고 낯선 느낌을 받는 또 다른 이유엔 처음 보는 것에 대한 생경함 탓도 있는 것 같다. 그림의 기법이나 형식이 익숙지 않은 구석이 많아 혹자는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의 얼굴, 종이에 혼합재료, 170 × 120 ㎝, 2008

서 궁극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김 그림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내 느낌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림에 담긴 작가의 의도가 보는 이에게 온전하게 전달되기는 쉽지 않다. 영화관에 가면 사람들은 마음에 안 드는 영화라도 2시간 가까이 시청한다. 그렇지만 그림은 찰나의 순간에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면 보는 이가 눈길을 돌려버린다. 전시회를 열어도 관람객이 휙 둘러보고 나가는데 20분 남짓이면 충분하더라. 관객의 시선을 묶어두지 못하고 그림으로 의도를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선 잠깐 새에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내 그림은 그런 부분에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다루고 싶은 소재는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때로는 버려진 동물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인구가 70억에 육박하며 양적·질적 팽창을 거듭하는 지금,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해에 대해서도 다뤄보고 싶다. ‘왜 세상의 어두운 면을 주로 다루느냐’ 묻는다면 ‘밝은 부분은 사람들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서 사연 많은 20대를 보낸 인생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김 요즘 대학생들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래도 일주일에 책을 한 권씩은 읽었으면 좋겠다. 학창시절, 일에 지쳐 집에 늦게 들어와도 하루에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부터 쌓여온 지식들이 나만의 감성으로 걸러져 작품에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그림을 그려올 수 있었던 원천이라고 느낀다. 컴퓨터 앞에서 앉아 단편적 지식을 습득하는 데 열을 올리기보다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그 주제에 대해 고민해보길 권한다. 언젠간 축적된 고뇌가 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순간이 올 거다. 

저작권자 © 성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09년 겨울호 [계간 수필세계] 이 시대의 눈빛을 그리는 프로

글 | 강여울(수필세계 편집 간사)
사진 | 박월수(수필가, 디지털 사진작가)

"무릇 그림이란 마음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산천과 인물과 수려함이든, 조수와 초목의 성정이든, 연못과 누대의 규칙이든, 그 이치를 파고들어 그 모습을 다하지 않으면 결국 일 획의 큰 법을 얻을 수 없다. 멀리 떠나고 높이 오르는 것도 모두 한 자 남짓한 거리에서 시작된다. 이 일획은 천지개벽까지도 포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억만 번의 필묵도 일 획에서 시작해 일 획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화가는 이러한 일 획의 법을 취하는 데 귀를 기울일 뿐이다." 
-중국화인열전 『석도』 중에서

우연처럼 그를 만나러 가는 행보는 느닷없고 갑작스러웠다. 그림이 아닌 문학에 심취해 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처럼. 미안하게도 나는 바로 전날 처음으로 그의 그림을 보았지만 그는 경력 사반세기(25년)에다 전업 작가로 활동한 것만도 십 년이 가까운 프로 화가다.
국내외의 화단에서 주목받는 김성룡 작가를 찾아 부산으로 달리는 마음은 두서없었다. 토요일,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당장 서둘러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를 꺼낸 지 겨우 이틀 만이었으니 사전 준비가 있을 리 없었다. 설상가상 차가 어찌나 밀리는지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 늦는 바람에 생각은 거의 백지상태였다. 이미 어둠이 자리 잡고 누운 지도 오래라 부산의 풍경은 다 지워지고 불빛들만 어지럽게 번뜩였다. 무색무념의 빈 도화지 같은 마음으로 그가 있는 아리랑갤러리로 들어선 것은 밤 아홉 시가 거의 다되어서였다.
부경문학회 행사에 참석했던 문우들과 함께 홍억선 주간과 이숙희 발행인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복원한 ‘낫’그림 앞에 선 그는 그림 속 인물들의 눈빛과 다르게 부드러운 눈빛이었지만 무표정했다. 그러나 운동화에 국방색 잠바 차림의 지극히 수수하고 평범한 모습에 두서없이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모르는 그림에 대해서 푼수를 두는 것보다 그림의 프로인 그와 나눈 대화를 독자와 공유하는 것으로 만남의 가닥을 잡았다.

갤러리에 전시된 그의 그림은 생생한 눈빛으로 낯선 방문자들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은밀한 생각들이 베이는 것 같아 무르춤하여 탁자에 놓은 화보를 보았다. ‘저녁 연주’에서 어린 소년, 소녀의 연주를 듣는 표범과 독수리의 꿈꾸는 듯한 눈빛은 놀랍도록 순했다. 인간보다 오히려 더 나약하고 고독해 보이는 맹수의 눈빛은 잠재된 모성을 자극해 자장가를 불러 주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눈빛을 닮은 그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저녁연주’에 대한 느낌을 말하자 그는 이번에 전시된 그림이 이전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졌다며 한 템포 쉬고 있는 탓이라 했다. 내년부터는 다시 강렬해질 것이라 했다. 더 강렬해진다는 말에 모든 그림의 눈빛들이 푸른 칼날처럼 생각의 갈피를 섬뜩하게 스쳤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물었다.


◼︎ 어느 날 갑자기 운명처럼
"(김성룡) 열여덟 살 때, 처음으로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 그림을 따로 그린 적도 없고, 고등학교에 다닐 그 당시에도 문학에 심취해 있었어요. 부모님의 영향도 있고,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이성복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도 있어요. 당연히 문학 서클에서 활동을 했었죠. 그런데 날마다 지나다니는 길목에 모작한 세계의 명화를 파는 그림집이 있었어요. 주인이 직접 그림을 그렸는데 대단한 실력이었죠. 참 그림을 잘 그린다 생각하며 무심코 지나다녔죠. 어느 날 그 그림집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더라고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림을 시작하고 생각하니 이미 여섯 살 때 운명처럼 그림이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자란 곳이 미군 부대 주변이었는데 이웃에 마루에 그림이 걸려 있는 집이 있었어요. 저는 그 그림이 좋아서 자주 그 집을 찾아가 한참씩 바라보다 오곤 했습니다. 절벽에서 흰옷은 입을 사람이 양을 안아 올리는 모습이었는데 예수의 그림이었지 싶어요. 그 기억이 구원처럼 나를 이끌었던 것 같아요."

홍 주간이 그의 그림들이 아주 독특하고 이미지가 날카롭고 섬세하며 새롭다고 했다. 시대의 아픔 같으면서도 현실 비판적이고 어떤 면으로는 사실적이라며 작가에게 누구의 지도를 받고, 그의 그림이 어느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냐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김성룡)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어요. 저 혼자 자유롭게 그렸어요. 대학에서도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따로 그림을 배우지도 않았고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데 대학 교육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작가들은 선생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거든요. 무슨 유파 하는 것이 그래서 나온 것이잖아요. 저는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만큼, 처음부터 길지 않은 인생 맘껏 자유롭게 그리자는 생각으로 그렸습니다. 이렇게 이전과는 다른 튀는 사람이 가끔씩 나와서 새로운 유파가 생기는 것 같아요. 고흐가 이전의 해바라기와는 다른 해바라기를 그렸듯이요. 고흐도 당시에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잖아요. 언젠가 그림전에 내 그림이 당선되었을 때 홍대 교수님이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분이 저를 보고 내 그림이 어느 유파인지 모르겠다고 하데요. 나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림을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책을 보고 나 혼자 그렸기 때문에 난 내 스스로 새로운 유파를 개척한 것이라 믿어요. 배웠다면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중국의 석도에게서입니다.
석도는 명·청 시대 사람이지만 그의 그림은 반 고흐보다 뛰어납니다. 석도는 유·불·선에 탁월했는데 그것이 그림에 나타나 있어요. 그의 화력은 세기를 뛰어넘어 지금 봐도 훌륭하죠. 그의 그림에는 혼이 들어 있어요. 제가 생각하건대 지금의 초현실주의도 실질적으로 석도가 앞서 그렸다고 봐요. 저도 그의 그림을 보고 원서를 구해서 읽으며 나만의 화법을 익혔으니 제 스승이기도 하네요. 또 제게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 교수님이 아니라 대학 다닐 때 ‘현실문화연구소’에서 활동하던 선배님들입니다.

신인(神人), 신의 경지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석도가 김성룡 그림의 지도가 되어서일까. 그의 그림에는 다른 그림들과 차별되는 기운이 느껴진다. 사진을 찍는 박월수 작가는 그의 그림이 접신의 경지에서 그려진 것 같다며,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청산에 눕다’를 좋아한다고 했다. 필자는 ‘밤의 계단’이란 작품에 마음이 끌렸다. 바쁘게 끝없는 계단을 오르며 뒤돌아보는 듯한 여인의 분열되는 두 얼굴이 마치 나의 자화상 같았다. 그의 그림은 이렇게 저마다 보는 사람의 영혼을 찌르는 날것의 기운을 지녔다. 홍 주간도 기법에서부터 그의 그림은 생동한다며 그의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경로와 그의 그림에 들어 있는 기운에 대해 궁금해 했다.

"김성룡 그림에 나타난 폭력성은 그 실체가 희미하기만 한 존재의 심해를 건너가는 도구이자 무기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은 그대로 그 심해 한가운데서 만난 풍경을 현실의 표면 위로 길어 올린 것이다."
- 미술평론가 고충환
 

◼︎ 그림에도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김성룡) 저는 모든 예술이 삶을 드러내는 것이라 봐요. 당연히 그림 속에도 이 사회를 드러내는 메시지가 있어야 되죠. 제 그림은 사회주의 민중미술에서 출발했어요. 그래서 사회주의 민중미술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사회학쪽으로 더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 사회 현실을 작가의 회화적 감수성, 감각으로 걸러서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그림이라 생각해요. 따라서 현장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죠. 광주 항쟁 때 현장에 가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역사적 자료를 수집한 것도 그 때문이었죠. 이런 작업들이 스물여섯 살 때, 역사화 쪽으로 관심을 갖게 했고 유관순, 민비, 민영환 등을 모델로 민족 역사화를 추구하게 해습니다. 그림에 사회적 서사, 메시지를 넣으려 노력을 했지요.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회화적 감성이 조화롭게 결합되어야 해요. 사진기자 생활을 오래 한 것도 그림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광주 항쟁 때도 그랬지만, 소년, 소녀를 그릴 때도 청소년들을 모델로 사진을 육백여 장이나 찍었죠.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서 체험하는 현실이 제 감각을 통해 잘 걸러져 이미지화되어 나올 때, 보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지요. 제 그림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유성 볼펜의 특성상 한 번만 실수해도 그림 전체를 버리게 돼요. 그러니 처음부터 치밀하게 완성된 구도를 잡아야 하고 실수가 없어야 해요. 당연히 그림에 몰입할 수밖에 없고, 몰입을 하면 자연스럽게 기운이 들어가게 되지요. 저는 감각으로 걸러진 체험이 머릿속에 완성된 이미지로 그려진 걸 화폭에 복사하듯이 옮겨 그립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성 볼펜 자체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려요. 처음에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삼 개월이 더 걸리기도 했어요. 지금은 어떤 재료든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서 한두 달에 한 작품씩 그리지만요. 습관이 되어서 이제는 한 작품을 그리면서 다음 작품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해요."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앞서 있었습니까? 
어떻게 유성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성룡) 처음에는 아크릴 물감으로 유화를 그렸죠. 물감이 떨어졌는데 물감을 살 돈이 없었어요. 그림은 그려야겠고, 뭐 방법이 없을까 하고 살펴보니까 방바닥에 볼펜이 있데요. 아, 이것으로 그려 보자 해서 그린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국내에서 저처럼 전체를 볼펜으로 그리는 화가는 없고, 외국에도 있긴 하지만 저처럼은 아니죠. 주로 유성 볼펜을 사용하지만 체질상 한 가지 재료만 사용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유성 색연필, 크레파스, 아크릴 물감, 연필 등 여덟 가지 정도의 재료를 같이 쓰고 있어요."

"섬세하고 예민한 더러는 신경질적인 그 날카로운 볼펜 선의 치밀하고 빼곡한 밀집을 통해 우리 역사와 사회의 아픔과 피비린내 나는 생채기와 얼룩을 또한 민감한 실존 의식의 내상을 우울하게 그려내는 김성룡의 작업에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에 의해 구겨진, 찢어진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지독스런, 치열한 실존적, 심리적 자존적 세계는 우리 시대의 보기 드문 예술가상을 떠올려 주는 듯하다."
- 미술평론가 박영택
 

◼︎선의 행간에서 태어나는 눈빛들
대담을 하기엔 갤러리가 약간 소란한 느낌이 들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그는 자신을 색으로 표현하면 무슨 색일 것 같으냐는 질문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냉소적이다 싶을 만큼 무표정하던 그였으므로 그 웃음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같은 색이라도 화가마다 생각하는 톤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멀리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을 보고 우리가 자리를 옮긴 곳이 바닷가 횟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문우들과 떨어져 그와 그의 매니저 박재형, 사진작가 박월수, 홍 주간과 필자가 다른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홍 주간이 그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화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화가 친구보다는 오히려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인 이영철 선배를 비롯한 이인철 같은 평론가와 미술영화부 기자들과 더 친하다고 했다.

우리는 그의 화집(畵集)을 보며 소주잔을 채웠다. 그는 입술만 적셨다. 필자와 대작을 한 박월수가 대구 화가들과도 교류가 있냐며 운을 띄웠다. “대구 화가들의 그림은 거의가 비슷하고 큰 변화가 없어 흥미가 떨어지는데 작가님의 그림은 신선해서 좋아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홍 주간은 김성룡 작가가 생각하는 우리 화단의 문제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묻고는 귀를 기울였다. 그의 목소리는 작고, 책을 읽는 것처럼 억양의 변화가 없어 사람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김성룡) 스물아홉 살 때 결핵이 와서 대구에서 요양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대구의 화가들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림이 똑같더라고요. 이것은 대구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자기만의 새로움을 모색하는 치열한 작가 정신의 결핍이 낳은 현상이라고 봐요. 탐구가 부족한 탓이지 않을까요."

이십대에 결핵을 앓고, 2004~2006년에도 요양을 했다고 했는데 그때도 결핵이었습니까?

"(김성룡) 아닙니다. 목에 종양이 있어서 수술을 했는데, 그때 공황장애까지 왔었어요. 그래서 몸의 건강을 위해 자연 속에서 휴양을 하기도 했지만 의도적으로 사람 많은 곳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건강이 그렇게 나빠졌던 것이 그림에 너무 몰입을 해서가 아닌가 싶은데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몰입을 너무 해서 건강을 돌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요.

"(김성룡) 그런 점이 없진 않지만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합니다."


◼︎ 눈빛과 시선의 화가
동안(童顔)인 그의 얼굴은 마흔넷이라는 숫자를 거부하고 있었다.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동시에 모든 것들을 읽고 있었다. 그의 눈은 그림 속의 눈빛이었으며 먼 곳의 눈빛이었다. 그의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필자는 그림 속의 강렬한 눈빛에 압도되었다. 감성의 바닥이 서늘해지는 느낌은 단박에 그를 ‘눈빛의 화가’라 명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여자라서일까. 나보다 앞서 이명옥 작가는 “김성룡은 사람들의 눈빛을 빌어 인간의 숨겨진 폭력성을 드러내는 놀라운 재능을 지녔다.”(『나는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 이명옥, 21세기북스, 2009)라고 말했다.
마주 보고 있으나 멀리 있는 그의 고독한 눈빛이 머물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결혼은 했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하자 홍 주간은 “대단히 편하시겠습니다.” 해서 모두가 웃었다. 필자가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는 동안 홍 주간은 쉴 새 없이 그에게 질문을 했고, 그는 충실히 대답했다.

"(김성룡) 한 번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긴 해요. 대구에 사는 기자였는데 사 년 정도 사귀었지요. 제가 워낙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고, 잘 떠돌아다니니까 견디기 힘들었겠죠. 자연스럽게 멀어졌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요.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닌데 여자와 함께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제 안에는 괴물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혼자 있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요. 편하기는 한데 아플 때는 곁에 누가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해요."

고향이 부산입니까?

"(김성룡) 아닙니다. 경기도입니다. 어릴 때는 의정부에 있는 미군 부대 주변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작업실이 부산하고 서울, 두 군데 있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럼 부모님은 서울에 계십니까?

"(김성룡) 부모님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도 없어요. 그래서 중학교 일 학년 때 포장마차를 했어요. 그 경험 때문에 지금도 포장마차는 안 가요. 고등학교 때는 조립식 주택 짓는 일도 했고요. 아르바이트까지 합치면 해 본 일이 백 가지는 될 겁니다. "

중학교 일 학년 때 포장마차를 하고, 체험한 직업이 백 가지나 된다는 말은 그의 험난한 이력의 고백이었다. 비로소 그의 그림에 따라붙는 날것의 이미지, 존재의 잠재된 내면의 폭력성이 이해되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카타르시스이며, 야성적 본능에 의한 무의식의 예술적 승화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온몸으로 번지는 전율 같은 열기를 동반한 취기는 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홍 주간은 한마디라도 더 들어야겠다는 듯 질문을 계속했다.

예술가들을 보면 의외의 취미를 갖고 있기도 한데요. 취미로 하는 운동 같은 것이 있습니까?

"(김성룡) 예전에는 산을 좋아해서 친구들과 산에 자주 가고, 암자에 한동안 머물기도 하고 했는데 이제는 혼자 산에 다니기는 그렇고 하루 한 시간 정도 걸어요."


◼︎ 대작을 꿈꾸며 그림과 정사를
외국 전시회도 하시고 했는데 외국은 어디 어디를 다녀오셨는지요?

"(김성룡) 외국은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외국 그림 전시 때도 그림만 보내고 저는 가지 않았어요. 글쎄요. 가 보고 싶은 곳이라면 영국 런던입니다. 미술사는 런던이 최고거든요. 내년쯤에 한번 가 볼까 생각은 해 보고 있어요."

예에, 그림 외에 달리 하는 것은 없습니까?

"(김성룡) 내년이면 다섯 권으로 된 미술 전집이 나올 거예요. 전국의 유명한 미술가 다섯 명이서 각각 한 권씩의 책을 써 동시에 출판을 하기로 하고 지금 집필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술뿐만이 아니라 비디오 아트, 사진, 평론 등 문화 전반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론입니다."

컴퓨터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컴퓨터 그래픽과 합성된 그림도 나오고 있던데 작가님은 앞으로 미술이 어떻게 흘러갈 것으로 봅니까.

"(김성룡) 모든 예술 중에서 미술이야말로 첨단 예술이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욱 다양한 시도가 나올 겁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퓨전 방식으로 기법, 형식의 발달이 더 빨라지겠죠. 그렇지만 저는 인간이 홀로그램보다 뛰어나다고 봐요. 따라서 개인적 트라우마도 계속될 겁니다. 설치미술, 오브제도 더 많이 성행하겠지만 그 중에 얼마나 살아남겠어요? 끝까지 살아남는 건 불과 한둘이겠지요.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사라지듯 그림도 사라지는 것이 남는 것보다 훨씬 많아요. 나는 민중예술을 할 때 사진을 하면서 실험을 많이 했어요. 예술이란 눈으로 본 것들이 개인의 뛰어난 감수성에 걸러져서 나오는 것이죠. 결국 예술이란 이 감수성의 싸움이에요. 남들이 안 했던 것을 하려면 남들이 한 번 생각할 때 열 번을 더 생각해야 세잔처럼 뒤집는 작가가 되지 않겠어요?"

남들과 다른 생각, 그리고 치열한 노력, 바로 저희가 찾는 프로입니다.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김성룡) 머릿속에는 앞으로의 영상이 다 잡혀 있어요. 지금까지는 자유롭게 그렸는데 이제는 공을 더 들여서 후대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릴 계획이에요. 대작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금은 의도적으로 쉬는 중입니다. 비록 걷는 것이지만 이 운동도 체력을 기르기 위함이지요.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을 때 더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이기도 하고요. 일 년에 한 점을 완성하더라도 세상의 어떤 것을 담아 놓겠다고 한 것을 담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작품은 그의 개인적 삶의 감각적 뿌리까지 내려가 역사 혹은 사회적 주제를 소화해 내는 그의 뛰어난 상상력에 기인한다."
- 미술평론가 이영욱

필자는 그의 그림을 보고 거듭 놀랐다. 먼저, 메스를 들이대듯 가슴을 서늘하게 관통하는 그림 속 인물의 눈빛에 놀랐다. 그 강렬한 눈빛이 딱딱하고 예리한 유성 볼펜의 터치가 낳은 시선이라는 사실에 두 번째 놀랐다. 그와 함께 있는 몇 시간 동안, 느긋한 사색에 가차 없이 메스를 가하는 그림의 모태인 김성룡, 그의 순하고 몽환적인 선량한 눈빛에 또 한 번 놀랐다(그를 만나기 전에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의 눈빛이 매섭고 서늘하다고 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에 붙인 그의 문장에 할 말을 잊는다. ‘그는 역시 프로다.’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뱀은 가시나무를 지난다. 그는 온전한 자기를 바쳐 그림과 정사를 나누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자식처럼 대대손손 이어져 인류 미술사에 끝까지 살아남아 그의 존재를 증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