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s note

※ 전시 등을 통해 공개 발표된 작가의 글 수록

2019 기억공작소전 <흔적-비실체성 김성룡>(봉산문화회관) 리플릿 수록

생전의 내 아버지는 나고야에서 태어났고 중학교까지 마친 후 한국으로 왔다.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다시 나고야에서 전철을 타고 낯선 일본 시골마을에 내렸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금빛잉어들이 놀고 있는 오래된 석조다리를 건너간다. 하굣길의 남녀 고등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순간 그들의 교복에서 풀빛냄새가 난다. 이 마을은 온통 짙은 강물 냄새와 천리향 냄새가 가득하고 햇살은 따스하다. 무심하게 마을길을 걷다가 가장 낡은 일본 전통가옥의 뒤뜰에서 마른 나뭇잎을 주어서 손으로 부벼 본다. 나는 이 마을의 집들과 나무들과 길들을 스케치하거나 사물들을 흔적들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곧 저물 무렵이어서 할머니가 주인인 식당에서 따뜻한 덮밥을 먹고. 30대 여성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멋진 인테리어의 옷 샵에 들렀었지. 그 디자이너가 만든 옷들은 흑백의 절제된 모노톤의 모던한 디자인이어서 좋았다. 나는 인생의 위대한 계절들을 숱하게 지나쳐온 노인들이 많은 이 마을에서 심신이 편안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하루가 덧붙여지는 가까운 과거가 아니라 새로운 마을을 만날 때마다 가질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발견한다.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닌 혹은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것의 이질감이 낯설고 소유해 보지 못한 장소의 입구에서 서성거린다. 지금 나는 나무로 만든 목조의 육교 위를 걷다가 마을을 내려다본다. 낯선 마을은 내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긁히고 선 긋고 횡단하고 잘리고 이어지며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의 연속이다. 

나는 본 일이 없다. 앞서가는 나의 저녁그림자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생멸문 앞에서 어떤 이유도 잊고 서성거리는 내 모습은 천리향 나뭇가지에 걸린 채 펄럭거리다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검은 비닐봉지였다.

「김성룡의 아포리즘」, 『시인동네 2014 여름호 vol.33』

「김성룡의 아포리즘」, 『시인동네 2014 봄호 vol.32』

「김성룡의 아포리즘」,  『시인동네 2013 겨울호 vol.31』 

「김성룡의 아포리즘」, 『시인동네 2013 봄호 vol.28』

2012 개관기념전 <공성훈, 김성룡>(Moon & Park) 수록

나는 걷는다. 이곳은 어디일까.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을까. 길 옆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나무들이 서 있었다. 고개를 들면 호랑이 만한 검은 새가 까마득한 창공을 선회하더니 사라진다. 시든 꽃밭에는 물뿌리개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어디선가 수많은 군중이 몰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지점에 멈춰 서 있었는데 그들이 에워싼 중심에는 뚱뚱한 사내가 웃통을 드러낸 채 고함을 치고 있었다. 

나는 걷는다. 어느덧 들길을 지나서 숲 속 길로 들어선다. 그 속의 영취산 하초에는 암자가 있다. 그 곳에는 구멍 뚫린 석벽에 금 개구리가 살고 있다. 길 다란 나무 작대기로 구멍을 쑤셔 대면 마루에서 발톱을 깍 던 스님이 등 뒤에서 그만해라 고함친다. 미안하다. 

나무발톱보살. 나는 관심도 없고 진심도 없으며 스스로를 책망 하지도 않으며 일심의 근저에 어떤 방편도 없다. 똥꼬를 찔린 개구리 보살이 송림 위를 점프하다가 힐끗 보며 눈을 흘긴다. 

어두워지며 하산하는 길. 길 위에서의 몸이 볏 짚단 같다. 허물 덮힌 눈과 마음의 세계의 코너에 몰려있다. 나뭇가지들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시비를 건다. 그래도 좋다. 늘 맞는 마음으로 공양을 받자. 

마지막 노을에 타 들어가는 사물들을 지나서 걸어갈 때에 나는 어느 지점에선가 멈추어 섰다. 내가 본 광경은 높은 나무에 걸려있는 사람의 시체였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곳을 다시 올려다보니 바람에 실려 온 검은 비닐이었다. 

나는 볼일이 없다. 앞서가는 그림자가 어느 방향으로 덮히는지를 이 생애에 또 한 번의 가을이 지나간다. 그러므로 근원적 유랑 속에서 내 흉곽을 두 손으로 벌린 후에 나에게 묻는다. 길을 열어도 번거롭지 않으며 담아도 좁아지지 않는 이 의심은 어디에서 논파될 수 있는가. 생멸문 앞에서 어떤 연유로 멈추고 서성일 때, 문득 세속의 풍경을 바라보면 먼지 폭풍 속에서 일천명의 내가 일천가지 웃음으로 땅을 치며 뒹굴고 있을 뿐이다. 

2007 김성룡 회화展 <존재의 폭력, 초이성의 공간>(화수목) 수록

이번에 전시되는 화수목이라는 이름의 건물은 기존의 갤러리들과는 다른 조금 특수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작품을 설치하고 제작하는 문제로 지금까지의 전시와는 다르게 심혈을 더 기울였습니다. 작품의 재료는 캔버스와 전통의 수제지인 장판지에 아크릴 물감과 유성볼펜, 먹과 석판화 색연필입니다. 이번에 보여줄 작업은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이고 실체론적인 생각의 근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얼굴의 부분이 나뭇잎으로 가리워져 있거나 형상의 윤곽이 흐릿합니다. 그들은 생의 중의적 경계에서 스스로를 출현시키는 형상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동안 2년여의 시간을 몸과 마음의 요양이라는 문제로 길 위에서 지냈었지요. 충남 강경에 있었고 강원도 라브리수도원 그리고 수많은 지형적 외곽과 사람들.. 숲길과 공기와 햇살입자와 바람 속에서 신발의 뒤축이 몇 번 닳았었지요. 외진 곳의 장소에 흔적처럼 머물 때마다 읽고 쓰고 스케치를 하며 지낼 때에 심적 경험을 통해서 직관한 세계의 모습은 현상학적인 폭풍의 저 너머에서 시선과정신의 무수한 변증을 경험 이였지요. 찰나에 빛처럼 소멸하고 경계에 사라진다는 소승불교의 허무한 사유를 아슬하게 비껴가며 나는 조금 더 가혹한 정진이 필요하였지요. 일초의 이미지가 섬광처럼 벽을 통과할 때에 그것을 진심으로 구해야하는 본래 명칭도 없으며 통과하지도 않으며 천류 하지도 않는 사물의 이치는 어두운 독공 속에서 가능한 것일까요. 한 장의 종이 위에 선을 긋고 호흡을 할 때에 보이지 않는 영성의 세계가 미묘한 작용으로 공간에 파동 칩니다. 이 공간의 미묘함은 현실이라는 몽환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응시하는 고요함 속의 마성입니다. 모쪼록 이 전시에서 당신과 나의 접촉점에서 관조의 열림이 지속되길...

2005 김성룡 회화展 <무의식의 날 것들>(space HaaM) 수록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벼락처럼 몸과 마음에 병이 찾아왔다. 그때부터 배낭 하나를 짊어진 채 떠돌아 다녔고, 공한 마음에 적멸은 없다. 깊고 오묘한 사물의 행간을 짐승처럼 지나치며 몸속은 화산 구덩이며 초지에 발걸음조차 미약했다. 心과 我를 떠날 수 없으니 일법이 만법의 마성으로 내 주위에서 짐승처럼 으르렁거린다. 보고 듣는 견해를 끊을 수 없고 앞의 자취에 스승이 없다. 대천세계에 눈뜬 불꽃인 하느님. 본래 근본이 없고, 소멸의 이치가 없는 인간에게 길을 열어 주소서. 검은 허공에 고요한 움직임으로 먼지 한점 떠돈다. 이 전시가 있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친구 김종범, 덕재건설 김운석 대표, 김약국 형님. 그리고 김용기님과 일광·세일여객 이상은 이사님과 가슴속 하늘처럼 늘 푸른 김세광에게 지면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2003 김성룡전 <흔적-비실체성>(사비나미술관) 팸플릿 수록

1
4월 5일저녁 금강암 길목 송림 속에서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이 패싸움을 한다. 거친 주먹이 난타하며 피 꽃이 터진다. 봄빛 송림을 뚫고 들어오는 저녁 햇살 속에서 나는 환각처럼 웃고 있을 뿐이다. 소주병이 깨지고 움직이는 감각적인 본능들은 개미떼 같다. 아름다운 피의 포물선, 진부함과 새로움 모든 경험과 그 밖의 분노와 감각의 반짝임, 하하… 어떤 종류의 살도 유리병에 찢겨 나가는 곳 살을 꿰뚫고 통과하는 외마디 음절과 리듬에 대한 강렬함. 영혼의 진흙 속에서 주머니의 볼펜을 꺼내어 그들을 스케치한다. 교복이 피에 젖고 누가 죽어도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다. 모든 폭력은 세상의 뒤에서 시작하는 것, 무엇때문에 그 모습은 비유도 비무도 아닌가. 확 풍겨오는 피비린내에 파멸이 그림을 만든다. 나는 그것을 무심히 느낄 뿐이다. 얼굴이 깨진 학생이 다가와서 담배를 요구한다. 담배 끊은 지 오래됐다. 자 금강암 물이다. 한 그릇 마셔라. 마셨으면 너는 가서 더 싸워라. 그러다 죽어도 자성은 없다. 그 공간에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권태와 공포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비실체성은 깨달을 수 없는 무기의 늪이다. 누군가 이치를 깨달을 때 지옥의 입구에 서 있는 허무와 직면 하게 된다. 평범한 바위에 앉아 암자에서 떠온 물을 마시며 무심한 오늘 세상의 길들이 만 갈래 찢어진 살의 흔적이다. 고개 들면 짙은 피의 거품 속에 끝나지 않은 싸움의 감각적 영혼들. 내가 너무 멀리 갔다. 내 영역을 너무 밟아 버렸다. 텅 빈 화산구덩이에 한줄기 바람이 지나가듯 몸체에서 벗어난 영혼이 경계없이 부유하는 곳, 피 꽃 튀는 장면 속에서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죽어 넘어진 소가죽처럼 뒤집혀 있는 저 아이들 도대체 오늘 물 맛은 왜 이렇게 시원한가. 

쾅 소리에 알던 바를 잃으니 다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네 얼굴을 움직이면 먼 길들이 드러나고 초췌한 소승근기에 떨어질 일이 없다. 상세의 시간 속에서 항상 존재하는 이것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없는 이것.

2
많은 사람들이 떠나간 그 곳에 원경은 소식이 없다. 풀잎의 이슬에 발 끝을 적시며 그곳으로 간다. 혼미한 길 옆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나무들이 서 있었고 천공에는 호랑이만 한 검은 새가 배회한다. 시든 꽃밭에는 누군가 물뿌리개를 든 채 서 있었다. 거북이 세 마리가 그 집 앞에 돌처럼 굳어 있었고 병아리를 파는 늙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푸른빛 유성들은 공중에서 내장이 터지듯 점멸한다. 시든 꽃나무들은 마음 바람에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횡단하며 배회하는 길의 지점에서 바다는 끝없이 출렁인다. 두 손을 들어 불가사의한 힘으로 물결을 짚으면 작은 배 한 척이 밀려온다.

그 속에 누워있는 창백한 얼굴들이 메마른 씨앗 같다. 한 얼굴이 카타콤의 입구를 묻는다. 모두 지면이 없는 낯선 사람들이다. 삶의 그림자가 탈색된 죽은 시신들, 근원 속에 잠들고 깨어있는 사이에 사슬 속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냉담한 광활함 속에 출현하며 사라진다. 그러므로 근원적 여행에서 내 흉곽을 두 손으로 쪼갠 후 나에게 묻는다. 길을 열어도 번거롭지 않으며 담아도 좁아지지 않는 이 의심을 어디에서 논파 될 수 있겠는가.

그는 얼굴이다. 

3
그가 항해하는 곳은 그 자신의 살과 피의 바다, 수없이 많은 동공과 신경의 그물망으로 이어진 통로 속이다. 살의 내벽에는 그를 반사하는 유리문과 피의 전산망인 혈관이 회전하며 지속적인 운행을 한다. 뼈는 살의 기둥이며 보철기관으로 그 속을 받치고 있다. 그 속에서 흐르는 피의 공간에 그는 떠내려가는 사람이다. 심해 속에는 수많은 조상들의 뼈가 가라앉아 있고 근원도 없는 이동과 회전 속에서 그의 눈꺼풀은 무겁고 그의 입은 제 살점을 게워낸다. 그의 눈동자는 무엇을 보았으나 본 일이 없고 귀는 수많은 소리를 들었으나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공포의 집중같은 이빨을 부딪히며 흘러가는 자이다. 그는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며 스스로 소멸하며 증식하는 가운데 어떤 경계가 없다. 다시 그 무엇도 아니며 그 경계조차 없어지고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를 이름할 수 없다. 스스로 우연에 의해 출현되어 존재하지만 늙음도 죽음도 없기에 소멸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발생시키며 실재한다하지만 어떤 것도 성립할 수 없다. 환영이나 꿈조차 없으며 가고 오는 것도 없다. 시간도 뒤틀리거나 부숴지는 혼돈의 공간에서 추론하며 증명할 수 없는 최초와 최후의 대륙이다. 그는 증식을 거듭하는 혼혈체이며 기생수이다. 벌어진 그의 입은 상어의 아가리 공포의 이빨 너머로 미분화의 공간에서 산에 절여진 본능은 한계가 없다. 그의 지속적 증식은 증명할 수 없다. 끝없이 출현하지만 어떤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성과 소멸이 발생한다고 하는 어디에서 그가 존재하는가. 출현과 소멸이 동시에 일어나면 죽은 곳에서 생김이 있을 수 있을까. 그의 허공은 무변하고 그의 세계도 무변하다. 의심은 차별이 없고 경계를 한계 지을 수 없다. 항상 고통받는 괴물이며 거대한 뱀의 눈동자로 어둠 속을 응시한 채 피의 해협 위로 떠내려가는 자. 성난 소리를 지르며 제 살점을 뜯어내는 그는 머물지 못하므로 눈동자에 달빛이 서려고 생각을 여위였으니 그 곳에 머문다. 

2002.6.4 [부산일보] [이책] 조론/승조 지음 

'조론(肇論)'의 저자 승조(384~414년)는 중관불교를 중국에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중관불교를 중국에 전한 고대 중앙아시아 쿠처에서 온 쿠마라지바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중국 불교의 본격적인 인도 불교사상 이해는 쿠마라지바와 그의 학파의 노력으로 시작됐다. 격의불교 시대의 중국에서 쿠마라지바는 '반야경''유마경''대승경론'과 나가르주나의 '중론' 등 300여권의 산스크리트 경전을 중국어로 옮겼다. 그의 손길에서 동아시아 불교권의 기초가 닦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가의 문하에서 위진남북조 400년간의 격의불교에 종지부를 찍고 불교 해석의 선두를 잡은 사상가가 승조이다.

쿠마라지바를 알기 전에 승조는 이미 명망있는 저술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는 고전에 능통했으며 도가의 형이상학에 심취해 있었다. 현학적인 노장의 허무사상이나 격의불교의 이설로는 죽음과 정신의 문제를 밝히기에 문제가 많음을 회의한다. 그후 '유마경'을 읽고 출가를 결심하는데 그때의 나이가 스무 살이다. 승조는 쿠마라지바를 통해서 대승불교의 철학적 깊이에 대한 훈련을 받게 된다. 승조의 방대한 중국 고전 이해와 유례없는 문장력은 스승의 역서에도 크게 기여한다.

20대의 나이로 경지에 오른 승조는 중국철학사상 아주 뛰어난 저작의 하나인 '조론'을 쓴다. '조론'은 불타의 해탈론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논서 중의 하나이다. 그 핵심은 공(空) 사상에 바탕하고 있다. 공 사상은 불교철학이 낳은 가장 난해한 사상이며 혼돈의 결정체이다. 공은 개념적 사유와 언어의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정의되거나 결론할 수 없는 공은 개인의 초인적 지력의 문제이다. '조론'을 읽은 이들이 분명히 정독하여 세월 속에서 사유한다면 불타의 49년 엑기스를 얻게 될 것이다.

'조론'의 대략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물불천론(物不遷論)'은 인간의 의식을 논하는 시간 공간의 비실재성을,'부진공론(不眞空論)'에서는 격의불교의 오류를 지적하고 진리의 실상이 공(空)임을 말하고 있다. '반야무지론(般惹無知論)'에서는 직관을 체득한 사상가의 적멸된 공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이 논의는 후대의 '돈오설'에도 영향을 주게된다. 또한 스승의 공 사상 체계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의 해탈론임을 알게 된다.

승조의 '조론'은 나가르주나의 교설 구조를 계승하며 해탈관을 제시하는 체계이다. 승조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누명을 쓴 채 생을 마감한다. 중국이 낳은 불세출의 이 천재는 짧은 생이었으나 불멸의 흔적을 남겼으니 그것이 '조론'이다.

1999 김성룡전 <흔적 비실체성>(동백아트센터) 팸플릿 수록

◼︎ 흔적 비실체성 2(1999년)

2월 15일 되돌아올 수 없는 지점까지 마지막 숨을. 그 날 둥근 무화과 나무아래 죽은 어머니 앉아 계셨다. 뒷담 너머 푸른 미나리 밭을 적셔오는 노을의 저 쓸쓸한 모습. 그 저녁에 찾아온 흰 새떼는 우리집 낡은 기와지붕 위에 내려앉고 수돗가 미나리를 씻던 누이는 웃으며 흰 치아가 새알 같았다. 노을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무칼을 깎던 소년은 불현듯 하늘을 보고 붉은 크레파스의 노을 속에 새들의 눈빛은 맑았네. 그날 자정 넘어 돌아온 아버지 짙은 흙 냄새 노을진 눈빛으로 죽은 어머니 머리맡에 고개 숙이셨고 이불 쓰고 숨 죽여 바라보던 그해 무화과나무 늘 푸른 시절 어머니 머리맡에 마지막 한약 냄새.

1984년 안개의 군단이 밀려오는 해안의 저물 무렵 부근, 찢어진 옷, 검은 가슴, 입술에는 실 같이 흐르는 핏물을 막을 수 없었다. 겨울 폭풍이 지나간 선창에는 목선들이 엎어져 있고 안개의 육수 속에 누이의 흰 얼굴이 혼령인 듯 떠올랐다. 푸른 실핏줄이 드러난 누이의 얼굴이 안개에 젖어있다. 그 곳에는 누이가 먹다 남은 밥그릇과 간장 종지가 엎어져 있었다. 조선 간장의 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누이는 입술에 묻은 몇 알의 밥알을 털어 내며 울고 있었어. 나는 하모니카를 불며 언덕을 오른다. 이상했어. 내 입술에 흐르는 핏물이 가슴을 적신다. 군화를 신고 둥근 천장에서 뛰어내린 아버지. 밥상을 걷어차고 숟가락이 방벽에 꽂혔다.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는 누이. 유리창이 덜컹거리고 뒤뜰에는 혼령의 어머니 붉은 눈… 내 손아귀에 깨진 병 조각이 쥐어져 있고 아버지 무릎에 칼집을 그었다. 밀려오는 안개 속 깊은 한숨. 육수의 해협에는 마치 이 쇄계의 처음이듯 거품이 부글거린다. 해안을 걷고 있는 내 뒤를 호랑이가 따라온다. 저리가… 안개의 다발 속에서 거품을 뚫고 천천히 떠오르는 것은 6.25때 산채로 수장된 시신이다. 해초에 감긴 갈비뼈 속에서 투구게가 기어 나온다. 다가오는 시신은 살점이 녹아 내린 이빨 사이로 나는 듣는다. 뼈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상한 웃음소리를… 나는 젖은 담배를 그의 입에 물려준다. 담배에 연신 불 붙이며 눈알이 빠져나간 안구에 타버린 성냥을 집어넣는다. 소금에 절여서 헝클어진 머리칼, 그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린다. 엉킨 삶이야. 공중에 멈춘 비행기 같은 삶… 지상의 시각으로 내 입술의 핏물은 깊은 뜰로 흩어진다. 습기찬 땅 속에 늘 서걱이는 모래와 얼음 매퀘한 유황의 불꽃 피는 황도의 해협에 지령처럼 따라오는 호랑이. 양수가 터지듯 밀려오는 물결 속에 뼈들이 밀려온다. 공중에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헬기 한 대가 지나간다. 굴륭의 하늘에 부서진 허리. 각혈을 하는 이곳 유배당한 객지의 불온성이다. 어서 가자…

 1999년 겨울 영취산 소나무 숲 해원암 마당에는 목력나무 아래 앉아 노래를 부르는 고승과 검은 용이 살고 있다. 살을 파고드는 겨울 바람 속에도 햇살은 따사롭다. 이 곳을 찾아온 내 영혼은 어두운 용골같다. 경계의 생각을 잡은 채 서성이는 이 장소가 사실 까마득한 절벽이다. 존재는 없고 무상도에 틀림없이 외도일 뿐이다. 벗은 안경알에 투사된 내 얼굴은 악마적인 것의 현존이다. 검은 용이 토해내는 입김이 안개처럼 절 주위를 덮고 있다. 이상하다. 열 개의 볼펜을 입에 문 채 방문한 내가 비무를 빌려 만물을 비우지 못한다. 항상 통하는 길의 외곽에서 스님의 노랫소리와 용의 입김 속 비릿함이 진제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볼펜을 토해내며 경전에서 인용한 논지를 성립시키면서 이 법을 세우기가 힘들다면 눈으로 보면서 깨닫지 못하기를 반생이 지나간다. 왜 인가? 첫째는 생멸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이다. 불각이 없을 뿐 아니라 본각에 의해서 시각도 없다. 꿈틀거리는 용의 수영을 만지며 오줌을 눈다. 일몰이 시작되는 해원암 저녁 빛에 두 눈이 맵다. 어디선가 한 줄기 돌개바람이 들이친다. 그 속에서 스님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명부를 옆구리에 낀 채 허우적거린다. 나는 시험 삼아 등 뒤로 걸어가서 궁둥이에 똥 침을 준다. 으흑… 똥 침의 세계로도 삶을 포섭하지 못하고 저녁 햇살에 그가 사라졌다. 들러보니 검은 용도 없고 절도 없으며 저녁 빛도 없었다. 황망히 사물의 끝이 없는 이 문제로 경계하는데 이것을 믿는 자는 단멸의 공에 떨어질 것이다. 이제 나무의 잔가지들이 앞을 가로막는 어두은 산 길을 내려온다. 들나귀가 득실거리며 창녀들이 웃고 있는 슬픈 세월 속으로 걸어간다. 자성을 외도했으니 즐거운 탁류의 생멸이다. 경에 의존하지 않고 성기 끝을 세워 정액을 방사하는 이 문제를 보자. 모든 나무와 공간에 먹장 구름을 뜷고 여윈 달이 창백한 빛을 방사하기 전에 내려가자. 세상의 절대적 심연 속에서 힘들게 기어가는 배추벌레의 형극이다. 수천 개 칼날로 생물을 베어내는 원귀의 바람이여. 저녁 밥상에 놓인 뜨거운 밥처럼 나도 담기고 싶다. 어째서 흐르는 핏물은 막을 수 없는가. 육근육경의 타는 갈증에 내가 간다. 산 길의 암벽에 새겨진 인왕상이여 그 주먹으로 내 머리를 부셔라. 나는 폭탁처럼 부숴지기 위해 견디고 있다. 길은 적교허광하여 적멸이지만 미묘하고 무한하여 유심은 알길 없다. 또한 일심의 이치를 증오하니 오직 돌발적인 사태로 내가 간다. 어떤 좆놈이 마음을 내주하며 등주하며 적정하며 조장하는 힘을 발생하는가. 겨울 바람에 실려 공중에 떠도는 원혼들이여 먼지로도 생사를 거듭나지마라. 세계는 일여하고 나의 성기도 둘이 아니다. 짓지 않은 세상은 없으니 만법은 광활하고 지혜도 관조할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날 눈 뜬 머리통을 잘라서 점진적으로 무위를 증득하는 이치를 안다면 이 속성은 촛불 같아서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무명은 말한다. 도대체 각혈 속 붉게 번진 하늘에 집으로 가는 이치를 아는가. 

1999 김성룡전 <흔적 비실체성>(동백아트센터) 팸플릿 수록

◼︎ 흔적 비실체성 1 (1997년)

1
붉은 꽃잎을 입에 물고 동백섬 사구를 돌아서 석탁같은 암벽을 지나간다. 바다 쪽으로 구부러진 노송 한 그루에 죽은 새가 걸려있었다. 그 나무아래 환각처럼 웃고 있는 늙은 최치원은 겹겹이 쌓인 어둠 속의 길일 뿐이다. 가야산 홍류동 깊은 계곡에 다이빙한 찢긴 영혼이 이곳에도 머물러 있다. 고개 들면 섬의 머리 위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곳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마다 일회용 종이컵과 피묻은 성교의 꿈이 버려져 있다. 미안하지만 시국을 탓할 일은 아니다. 옛 시대의 최선생도 흐르는 물결에 붓끝을 담아 마음을 삭혔을까. 적막한 쇳내음 가득한 동상 앞에 서면 대리석에 음각된 그의 싯귀들이 아침햇살에 선명하다. 마른 손가락으로 그 글귀를 짚어보면 문득 돌을 깨뜨려 그를 꺼내고 싶어진다. 세상에 할 짓이 없어서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혼자 엎드려 토할 때의 깊은 회한처럼 더운 공기로 살고 싶다. 어느 날 불현듯 동백섬 사구에서 목 없는 글들이 해일에 씻겨 떠내려간 후 모든 길들이 새까맣게 타버려도 늙은 수염을 펄럭이는 선생은 아직도 변신 중일 것이다. 그러므로 석벽 앞에서 꽃잎을 토해내며 불탄 심호흡을 하는 나의 눈에 모든 의문은 세상의 뒤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비록 의심을 지우지 못하였으나 일심은 깊고 의지하는 일 없이 걸림조차 없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것을 추적하면 날개 달린 쥐떼들이 해협 위를 항해한다. 전생이 이끄는 대로 행을 지어 업이 축적된 오늘 음각된 글조차 꽝 문닫는 소리 고개를 들면 만 갈래 흔적들이 떠오르고 동백숲 사방에서 튀어나와 내 뺨을 후려치며 지나가는 이 사태는 돌발적이며 에피쿠로스의 원자의 비가 낙하되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내 흉각을 두 손으로 쪼갠 후 나에게 묻는다. 길을 열어도 번거롭지 않으며 담아도 좁아지지 않는 이 논리는 어디에서 논파할 수 있겠는가.

2
세속의 비는 멈추지 않고 용수 암으로 가는 길도 쉽지가 않다. 살을 파고드는 겨울비와 짙은 안개 속을 꿈길인 듯 걷는다. 검은 우산을 쓴 채 길을 더듬는 내 모습은 어두운 용골같다. 그러나 흙과 나무 풀잎의 싱싱한 이 냄새에 취한 듯 혼곤히 젖어드는 몽유의 걸음으로 산길 혈맥 위에 부유하다보면 어느 덧 용수암 입구가 보인다. 길의 입구에는 나무에 걸어놓은 안내판이 비에 젖어있다. 빗줄기가 생멸하는 어공에는 검은 새 한 마리 지나간다. 순간 그 장면이 확장되어 마취에 깨이듯 풀려나는 근육이 시원하다. 단 한 마리의 새가 공간을 휘저으며 그 살 속으로 지나가는 흔적을 살 비린내 풍기는 아득함이다. 무엇때문에 실제 새는 비유가 아니며 비무도 아닌가. 

땅의 틈새가 갈라지는 곳에 물길이 형성되고 그 실핏줄 같은 생사의 강에 부스러기 나뭇잎 마른 나뭇가지가 실려간다. 용수암 불이문이 보인다. 그 곳의 외길에는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이 소실점을 이룬 채 병렬되어있다. 이렇듯 가파른 평지가 나타나며 그 속에 암자가 내장되어 있다. 이래서 길에 떠도는 삶은 매혹적이며 몸 속의 악을 견디고 있다. 밖의 허공을 향해 고함치면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게 된다. 끝내 절멸이며 포기할 수 없는 경계의 흔적이다. 빗줄기를 받기 위해 우산을 접은 해 걷는다. 천천히 내리는 빗물이 젖은 얼굴 위로 부숴진다. 이제 집착을 버리고 어서 가자. 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등뒤에서 배회하는 혼령들의 섬뜩함은 무관심으로 개의치 않은지 오래이다. 길들은 멀어지자 앞길이 다가선다. 황망한 세월을 찢으며 가자. 가장 정갈한 숲의 투명한 빗줄기 속에 내가 있지 않은가. 절집 마당에는 장좌불와의 매운 흔적일까. 강한 기운이 서려있다. 뜰의 돌담에는 늙은 은행나무 두 그루 보기 좋게 마주 서 있다. 스님들 생시에 호흡을 나누었을 영물이다. 땅에는 풀잎들이 자연스럽게 돋아나서 방치되어 있으나 이 곳이 폐사지는 아니다. 그 자연스런 성장이 보기 좋다. 미약하게 증거하는 저들은 사실 우주의 심장부에서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다. 그 무게가 전이되어 풀잎조차 위대하다. 법당 마루에 걸터앉아 젖은 머리를 닦는다. 강원도 산사로 출가한 친구들과 간혹 들르곤 하였던 이 암자가 이제는 동행이 없으니 인연의 고리 속에 형상은 있으나 실체가 없다. 그 곳의 친구여 인간의 사유로 밝힐 수 없는 집착 속에서 내가 활시위를 당기면 그 화살은 능선을 돌아서 내 등뒤에 박힐 것이다. 사태가 이와 같으니 쉬어라 분별조차 쉬어라. 튀어나오는 이 발생은 지극히 의존적인가. 이래서 원인의 경계성도 없으니 고혼이다. 벗은 안경알에 투사된 내 얼굴은 불사의업의 실체이다. 

하늘에는 어느 덧 빗줄기가 끊기고 불이문 너머 누군가 들어온다. 고개를 숙인 채 서슴없이 다가오는 그의 옷에서 젖은 김이 솟는다. 흙투성이 신발을 철퍽이며 다가선 그의 모습은 피가 멎는 서늘함이다. 손을 들어 천천히 그 얼굴을 젖혀보면 아 놀라워라 캄캄한 심연처럼 내 손안에 뭍어나는 검은 타르와도 같은 액체. 노출되는 그 얼굴은 오래 전 이곳에 두고 온 내 영혼이 아닌가. 죽음의 서늘한 등짝을 긁으며 배회하다 이제야 만났구나. 어디에 있었는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니 이 인식은 어째서 식은 핏물이 넘치는가. 피범벅의 모습으로 찰나 찰나에 유전하는 실체가 내 눈앞에 갈라진 얼굴 구더기 덮인 모습으로 나에게 왔다. 이것이 삼세의 시간 속에 항상 존재하는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없는가. 언설로 도저히 설할 수 없는 것이 현상의 경계를 뚫고 나에게 내 놓은 이것, 실재하게 만드는 인습의 마성적 공간에서 잘린 팔을 던지며 피 웃음을 철철 웃는 이 악습의 사유를 포섭해야 한다. 만약 그것조차 공하다면 내 살가죽을 먹는 이 자성은 시작도 없고 소멸도 없다. 식은 핏물이 기와지붕을 적신 채 흐르고 만물이 죽음도 없으니 비존재도 괴멸도 없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 의심은 성립될 수 없는 호랑이 머리의 좆. 어떤 형체도 아닌 무명의 가슴에 박힌 칼-. 하-학 그-그래도 저-정교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멸의 언설 속에 이 이것을 떠나면 존재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