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2020.1 [PUBLIC ART] 갖고자 울 것이며 | 이진명

artist Ⅱ KIM SEOUNG RYONG 김성룡
| 이진명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성룡의 회화 세계는 너무나 광대하고 깊다. 그래서 글로 그 세계를 설명하려는 온갖 시도들이 애처롭고 가소롭다. 어떤 나라 어떤 시대에서도 보지 못했던, 독창적인 색채와 구도, 그 내용이 보는 사람들을 경이의 순간으로 내몰았다. 다만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생각하고자 한다. 우선 한 편의 시가 김성룡의 문턱에 발을 딛도록 도와준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장편 시 <서곡(Prelude)>의 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느낀다네. 느낄 수밖에 없다네. / 그것들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슴은 떨린다네. / 불멸의 우리 존재가 더 이상 그처럼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들을 / 필요로 하지 않으리란 생각을 한다면 그럴 걸세. 그러나 우리 인간은, / 그가 대지의 아이들로 살아가는 한에서는 / 결국은 잃게 될 것을 갖고자 울 것이며,

이 시는 우리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말해준다. 우리는 '불멸의 존재(immortal being)'인 동시에 '대지의 아이들(the child of earth)'이다. 결코 어려운 뜻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신성이 깃들어있다. 신성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우리가 초월적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며 우물가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보면 누구라 하더라도 구하려는 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 좋은 가치를 살리고 나쁜 가치를 가려서 지선의 공동체를 충분히 꾸릴 수 있는 능력과 양심이 있다. 그래서 불멸의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불멸의 존재는 육신이라는 존재에 볼모로 잡힌다. 육신의 기운은 우리의 맑은 신성의 거울에 먼지가 드리우게 한다. 모두가 살기보다는 내가 먼저 살도록 종용한다. 시인은 육신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게 되고, 육신이 잘 살게 해달라고 울부짖는 우리를 가리켜, 대지의 아이들이라고 노래했다. 

작가는 이 대지의 아이들로서의 우리와 불멸의 존재로서의 우리를 모두 회화라는 매체로 극화시킨다. 워즈워스의 시어들이 감동을 울릴 때 그것은 추상적인 관념으로 우리의 손길을 떠나지만, 김성룡은 그 울림을 눈에 보이는 총체적 색채로 보다 구체적인 형상으로 인도한다. 김성룡의 내용은 크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는 고흐(Vincent van Gogh)를 가장 좋아한다. 또 '역사화' 시리즈가 있다. 위대한 인물이 증험하는 역사의 물결이 아니다. 농부와 소, 이등병, 거리의 소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파괴하면서 펼쳐낸 역사이다. 또 '인물화' 시리즈가 있다. 이 시리즈 역시 인간들이 각자 자기의 목소리를 높인다. 때로는 자아가 해체되면서, 때로는 이성을 상실하면서, 때로는 유혹에 빠지면서 각자가 목소리를 낸다. 가시밭길 같은 인생의 여로를 직시한 채 스스로 다짐하는 인물들도 있다. '풍경' 시리즈도 있다. 미적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다. 자기 성찰을 상징으로 풀어낸 풍경이다. 옥수수와 탐스럽게 익은 석류로 표현한 제주의 섯알오름, 바농오름, 대정마을은 몽환적이며, 그리고 바람이나 영원의 시간을 응축하고 있는 바위를 그려서 인간 시간의 덧없음을 현시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Hermas)의 매인지 『시경』에 나오는 연비어약의 매인지 알 수 없지만, 작가의 풍경에서 매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덧없는 인간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신적 시간을 향유할 수 있는 존재, 자기가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존재,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자기의 심적 거리를 대지의 아이들로부터 지키는 존재, 이 모든 것의 상징은 매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김성룡을 이해하기 위해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프로메테우스는 아버지 제우스(Zeus)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 이 신화는 예술가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 화로에 불을 붙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본 적이 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불길로 달려간다. 그 눈부신 불길의 일렁임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불길로 다가가는 나의 뒷덜미를 잡는다. 촛불에 손대려 한 적도 있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손목을 막대기로 내려친다. 불에 대한 욕망은 좌절된다. 그리고 어느덧 나이가 들어서 아버지의 성냥을 훔친다. 산 속에 잠입한 나는 성냥을 나무 장작에 붙이고 버섯과 곡식을 구워먹는다. 황홀하고 포만감이 들어 사색에 빠진다. 아버지의 불 다루는 솜씨와 나의 그것을 비교한다. 영원히 아버지의 솜씨를 넘어설 수 없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나의 불 다루는 솜씨를 더욱 가다듬어 주변 사람들을 밝혀주고 온기를 주고 도구를 주리라 다짐한다. 모든 예술가는 프로메테우스다. 그리고 예술가에게는 아버지 제우스가 있다. 김성룡에게 제우스는 빈센트 반 고흐이다. 서른일곱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가장 긴 시간의 돛으로 우리의 뇌리를 덮는 사나이를 작가는 사랑한다. 고흐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존경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고흐가 자기의 그림 역정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기를 기원한다. 그렇기에 나는 김성룡이 진정한 프로메테우스라고 생각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어로 프로(앞에, pro)라는 어근과 만난 합성어이다. 따라서 '미리 생각하는 사람(fore-thinker)'이라는 뜻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는 에피(나중에, epi)라는 어근을 써서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after-thinker)이라는 뜻이다. 예술가는 미리 배우고 미리 생각하며 미리 아는 사람이다. 동양의 말로 옮기면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 즉 생이지지한 사람이다. 반면에 철학자는 나중에 배우는 사람이다. 예술가가 미리 보았던 세계를 해석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동양의 언어로 옮기면 배워야 아는 사람, 즉 학이지지가 된다. 김성룡이 지금까지 구축한 불가사의한 회화 세계를 우리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김성룡이 미리 보았던 세계를 앞으로 학자들이 진지하게 해석한다면 새로운 인문세계가 우리에게 도래하리라 믿는다. 나는 언젠가 김성룡의 세계에 감격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알파벳 'p'로 시작되는 단어에 유달리 영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예언자(prophet)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성직자(priest)가 그렇고 목회자(pastor)라는 말도 있다. 전도사도 흔히 'preacher'라 말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시인(poet)과 화가(painter)에 있다. 나는 잘 연결되지 않는 이들을 언제나 '프네우마(pneuma)라는 단어 속에 포개어 생각하곤 한다. 프네우마에 연결 지으면 서로 다른 직업이 원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프네우마는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뜻이다. 이 숨결은 무의미한 세계의 허무성에 섬광을 비추어, 의미 있는 세계로 만들어 준다. 프네우마의 숨결은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세계에 나타나게 되며, 이때 의미 없는 세계를 허무는 의미로 가득한 물결이 되어 요동친다. 시인의 목소리를 손으로 옮겨서 또 다른 차원으로 현시하는 사람이 화가다. 시인은 의미의 물결을 일으켜 우리에게 파장을 보낸다. 그런데 화가는 단순한 풍경과 대상에 숨결을 불어넣어 섬광의 세계로 직접 현시시키기에 시인의 그것보다 위력적이다. 그런데 화가의 그토록 중요한 책무가 동시대에서는 상실된 지 오래다. 동시대 회화는 전략을 위한 회화이고 회화를 위한 회화이다. 회화가 생래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근원에 대해 심도 있게 파헤쳐가는 화가를 요사이 보기 어려워졌다. 더구나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독자적 형식과 기법을 완결해가면서 근원을 묻는 작가는 없었다. 그런데 김성룡은 이 안타까운 사태를 말끔히 씻어 버린다. 모든 대상, 가령 지인들, 역사적 인물, 풍경, 동식물, 우화, 사건, 시공간을 화면에 소환시켜 숨결을 불어 넣는다. 각기 다른 화면들이지만, 하나로 응축되어 일관되게 흐르는 뜻을 보여준다. 우리가 보는 세계의 모든 대상은 서로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무한한 사태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생멸해간다는 사실을, 김성룡은 캔버스 하나에 극화시킨다. 나는 이 화가의 힘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2019.3 [아트인컬처] 은유의 뼈 | 김종길 미술평론가

◼︎ 김성룡展 1.17~3.31 봉산문화회관
◼︎ 민정기展 1.29~3.3 국제갤러리

민정기와 김성룡의 회화는 눈앞의 현실이면서, 그 현실이 지금 이곳에 당도하도록 시간이 쌓은 ‘배경(背景)’으로서의 역사요, 신화다. 마술적 판타지의 신화적 세계가 펼쳐지는 꿈이고, 이 현실의 삶을 좌우지하는 주술적 세계관의 신념이다. 그들의 놀라운 직관과 인지 능력은 풍경과 풍경의 너머를 관통하면서, 비밀스런 세계의 실체라는 것이 사실은 이 현실의 앞뒤에 붙어서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이 창조한 이미지는 그러므로 앞뒤가 없는 현실이면서 동시에 앞뒤가 붙은 현실일 수 있다. 은유의 탄생은 바로 그 ‘앞뒤’라는 초현실적(혹은 비현실적) 리얼리티에서 비롯한다. 민정기의 회화에서 이미지의 은유는 ‘앞’을 아름답게 그리되 ‘뒤’의 서사를 풍부하게 함으로써 발을 떼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신묘한 매력을 가졌고, 김성룡은 ‘뒤’의 서사를 마치 ‘앞’의 풍경인 양 극진하게 묘사하되 사물/인물 하나하나에 상징의 언어를 덧씌워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매력을 풍긴다. 둘 다 회화에 ‘은유의 뼈’를 심었다.

◼︎ 회화적 상상과 민낯의 현실

민정기의 캔버스는, 그 캔버스를 채운 이곳저곳의 풍경들은, 색 비늘로 찬란했다. 수천수만 개의 붓 터치는 그가 그린 풍경보다 먼저 눈을 사로잡았다. 이 색 저 색 겹겹이 쌓여서 흩날렸다. 그렇게 흩날리는 색들이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고 강이 되고 산이 되고 집이 되고 길이 되었다. 온 천지가 형형색색으로 황홀했다. 산 너머 산인가 하니, 색 너머 색이면서 풍경 너머 풍경이었다. 하나가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여서 만물이 서로 걸림 없이 원만하게 융합된 회화적 세계! 2016년 10월의 금호미술관 개인전 이후 꼬박 2년을 그는 이렇듯 잡화엄식(雜華嚴飾)의 현실계를 그리고 완성한 듯하다. 

그림 속의 현실계는 화엄일지 모르나, 화엄을 걷어낸 자리의 현실은 불국토도 아니고 연화세계도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이 세계가 거대한 연꽃이고 그 가운데에 모든 나라와 풍경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사진단, 묵안리, 청렴포, 인왕산, 백악산, 수입리, 화암사, 옥순봉, 세검정…. 작품제목에 등장하는 실제 이름의 산과 사찰, 마을과 지명은 그가 그리는 곳이 단지 어떤 풍경이 아니라 ‘구체적 장소’로서의 풍경임을 지시한다. 화엄의 회화적 상상과 민낯의 현실이 충돌하는 장면이다. 어쩌면 그는 회화 속 현실과 지금 이곳의 현실을 동시에 사유하면서 그 ‘현실’이라는 실체가 무엇인지 궁리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민정기의 눈은 자주 뒤집혀야 했을 것이다. 그가 보는/보이는 현실과, 못 보는/보이지 않는 비현실을 동시에 마주하기 위해서 말이다. ‘보는/보이는 현실’로서의 풍경이 변화무쌍한 이 세계의 한순간으로서 ‘지금, 이곳’의 살아 있는 현재라면, ‘못 보는/보이지 않는 비현실’은 숱한 시간의 순간들이 수억 년으로 누적되어 쌓인 역사로서의 과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과거는 역사 거울(혹은 우물)너머에서 구조주의를 탄생시켰던 언어학과 인류학의 기호, 상징, 신화, 정신 등으로 가득 차 있을 테고. 민정기의 회화는, 풍경 너머에서 그런 기호와 상징과 신화를 자주 엿보인다. 그것들이 구조화되어서 풍경의 골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회화의 표면에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현상학, 두 개의 인식론을 섞었다. 그리고 그 표면에 새긴 풍경들이 드러내는 다층적 언어의 심미성을 숨기지 않고 노출했다. 옛 그림 속 풍경이 현실과 오버랩되고, 다시점의 공간성이 동시에 표현되며, 부감과 평원, 근대와 현대, 옛집과 새집이 들러붙었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하나의 세계’였다. 사실 예부터 우리는 이 땅이 그것들을 구분하지 않는 일원론의 세계라고 믿지 않았던가! 불국(佛國)이나 도원(桃源)은 극락정토요, 무릉도원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이 현실에서 이루고자 했다. 비현실과 초현실의 관념이 궁궁처(弓弓處) 혹은 십승지(十勝地)라는 이름으로 이 현실에서 거룩한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굶주림, 싸움, 재앙, 질병이 없는 피난처, 하늘과 땅의 신령이 내려와 숨 쉬는 곳으로서.

국제갤러리에 펼쳐 놓은 그림들은 고지도는 물론이요, 신화적 서사와 민화적 상상력, 게다가 하늘과 땅과 물의 흐름으로 인간 삶의 이치를 따졌던 주역의 풍수지리 역술과 그것의 술수(術數)까지 펼쳐서’(우리)풍경’의 미학적 구조를 파고들었다. 겸재 정선의 <청풍계>속 화풍이 들고나고, 1980년대 초반 그가 처음 시도한 이발소 화풍이 들고나고, 고산자 김정호의 지도 화풍이 들고나고, 여러 그림을 지그재그로 이어붙인 병풍의 구조가 들고나고, 옛 지세와 산세가 어떻게 깎이고 뚫리는지, 도시 건물이 세워지면서 땅과 산이 어떻게 부서지는지를 증언한다. 그런데도 한 작품 한 작품이 크기나 주제, 또 그리는 형식들이 조금씩 다름에도 마치 하나의 세계를 이루듯 어떤 구조 안에서 완결성을 이루는 것이 참으로 신묘하다.

◼︎ 죽어간 영혼들의 표상

김성룡의 전시는 때때로 문맥을 상실한다. 여러 개의 작품을 하나의 주제로 엮기에는 작품 하나하나가 너무나 다른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작품은 온전히 ‘하나’로서 존재할 뿐이다. 서로 다른 문장을 이어 붙여서 시나 소설을 지으면 난독(難讀)일 수밖에. 그러니 문맥을 따지기보다는 ‘하나’를 온전히 읽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최근 제주에서 작업한 것 중에는 같은 주제의 작품을 여럿으로 제작한 것이 눈에 띈다. <섯알오름> 시리즈가 그것인데 ‘가을’ '새벽' '저녁' '노을'을 부제로 붙였다.

<섯알오름-가을>(2016)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석류나무를 그린 것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나뭇가지에 붉은 석류가 알을 터트리고 있다. 그런데 가로의 큰 줄기는 죽어 말라비틀어진 듯 검고 거칠다. 그 줄기를 사선으로 내리 뻗은 가지들도 죽은 가시나무처럼 처연하다. 그런 나뭇가지에 새빨간 석류 열 개가 달렸다. 푸른 하늘, 검은 나무, 붉은 열매, 날카로운 가시들의 조합은 마치, ‘시간-죽음-피-총’의 은유를 상상케 한다. 서귀포 대정읍 상모리 1618번지. 높이 40m, 둘레 704m의 이 작은 오름은 학살터였다. 4.3이 진정될 무렵 6.25전쟁이 터지자 내무부 치안국은 불법적인 예비 검속을 벌여 수차례에 걸쳐 210명을 이곳에서 죽이고 암매장했다. 작가는 큰 줄기 위에 어슬렁거리는 흰 표범 한 마리를 그렸다. 어깨에 해골이 문신처럼 박힌 표범은 그렇게 죽어간 영혼들의 표상일 것이다. 같은 제목으로 2017년에 그린 것은 죽은 옥수수다.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옥수숫대에 매달린 옥수수는 흰 해골 알갱이를 틔우고 있다. 역시 푸른 하늘이 배경이고 그 배경을 가시넝쿨로 채웠다. 수확의 계절 ‘가을’을 부제로 단 <섯알오름>은 되살아나는 영혼들의 환한 부활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7년에 그린 <섯알오름-새벽>, <섯알오름-저녁>,<섯알오름-노을>의 주인공은 매다. <공의 뜰>, <바농오름-깊은 잠>도 그해에 그렸고 동일하게 매가 등장한다. 이렇게 보면, <섯알오름>에서 비롯한 주제 의식이 몇 개의 장면들로 이어지면서 ‘제주’와 ‘4.3’을 엮은 독특한 상상계의 긴 문장을 새겼다는 생각이 든다. 표범이나 옥수수와 달리 매라는 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이 동시에 작동하는 상징물이다. 제주에 살고 있는 매는 한반도 전역에 사는 해동청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제주에서는 한라산의 산신이기도 하다. 해안 절벽에 살면서 백록담까지 먹이 사냥을 나서는 것이 매의 현실이라면, 차귀도(遮歸島) 앞바다에 폭풍을 일으켜 송나라의 풍수지리가 호종단의 배를 침몰시킨 건 매의 신화다.

김성룡은 이 매를 주인공으로 제주 섯알오름의 여러 풍경을 보여 준다. <섯알오름-새벽>은 환하게 타오르듯 일렁이는 숲과 나무를 그린 생령이 깃든 풍경화다. 여명으로 어둠이 걷히는 하늘과 그렇게 걷히는 어둠을 응시하는 매의 당당함이 그 풍경화를 역사화로 읽게 만든다. 반면, <섯알오름-저녁>은 을씨년스럽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과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죽은 나무 한 그루가 해안가에 서 있다. 그 나뭇가지에 매가 앉아서 화면 밖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땅도 바위도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였으나, 그곳에서 어린 소나무가 힘차게 자라고 있다. 푸른 솔잎을 가시처럼 틔우면서. <섯알오름-노을>의 이미지도 그와 유사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돌담에 앉은 매가 이곳을 노려본다. 하늘은 어떤 불길한 징조를 엿보이는데, 돌담에 뿌리내린 푸른 선인장이 자라고 있다. 
그늘과 죽음, 빛과 삶(生)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매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신의 대리자일 것이다. <섯알오름-저녁>과 <공의 뜰>은 마치 한 쌍처럼 이어진다. <공의 뜰>은 푸른 소나무, 아니 생령이 깃든 나무들로 숲이 환하다. 그 환한 숲에 앉아서 매는 고개를 돌려 여기, 이곳의 우리를 본다. 푸른 영혼들이 이곳에 다시 싹트는 순간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2014.12 [아트인컬처] 회화, 신경질적인 비판 | 공성훈 작가

김성룡, 평원, 종이에 혼합재료, 175×125㎝, 2005

"그 공간에서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권태와 공포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비실체성은 깨달을 수 없는 무기의 늪이다. 누군가 이치를 깨달을 때 지옥의 입구에 서 있는 허무와 직면하게 된다. 평평한 바위에 앉아 암자에서 떠온 물을 마시며 무심한 오늘 세상의 길들이 만 갈래 찢어진 살의 흔적이다."

우리는 맞설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종종 상처 받게 되는데, 사실 진정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은 그 힘이 배려를 가장할 때이다. 약자에게 동시에 주어지는 사랑의 말과 폭력의 몸짓. 그 모순된 메시지가 불러일으키는 '이중구속(Double-bind,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정신분열증의 원인으로 설명한 용어)'의 상황. 그게 국가든 자본이든 부모든 권력은 항상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삶을 지배한다. 
우리 삶에 만연한 불안정성과 혼돈은 얼핏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상수와 변수의 방정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고, 사실은 심연 욕망과 콤플렉스가 와류를 일으키는 심연으로부터 발생하는 것 같다. 내 그림에 등장하는 파도, 바람, 절벽, 폭포, 촛불, 앙상한 나뭇가지. 지리멸렬한 현실에 통속과 신파가 건네는 위안에 기대어 보지만, 통 하려는 속된 욕망은 한 치 안도 들여다 볼 수 없는 심연 앞에서 항상 좌절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불가사의한 갭. 
강철 같은 뼈와 근육으로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 맞서면 좋으련만 점막으로라도 느끼고 반응하는 것. 섬세하고 연약한 점막에 뿌리는 마취제나 진통제가 아니라 각성제가 되는 것. 예민하다 못해 신경질적이 되더라도 피부와 내장의 사이, 그래서 세상과 내장의 중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주목하는 것.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초현실의 경계에서 다시 현실로 되돌아가기. 더욱 생생하게 되돌아가기. 이상이 내 그림이 가려고 하는 지점이자 김성룡 작가에게서 보게 되는 것들이다. 나는 어스름한 세상에 서 있고, 김성룡은 저 너머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담뱃불이 용접기의 불꽃만큼이나 강렬하게 그려지기를 원하고, 김성룡은 담뱃불이 연옥의 불길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정화시키는 마술적 힘을 발생시키길 원하는 것 같다. 

2013.4 [아트인컬처] 초현실계의 리얼리티 | 김종길 미술평론가

정약용 왕의 성기, 종이에 유성볼펜과 아크릴, 170 × 123 ㎝, 2001
아트인컬처 2013년 4월호 73쪽 스캔본

김성룡의 개인전 <Trace-Immateriality>전은 1990년대 작품부터 최근작을 한자리에 모았다. 복합문화공간 꿀&풀의 마지막 전시로 열렸다.

김성룡展 3.8 ~ 3.30 복합문화공간 꿀&꿀풀

복합문화공간 꿀&꿀풀에 열린 김성룡 개인전은 25년 여 작품 세계에서 후반부 15년궤적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작품으로 꾸려졌다. 전시에 선보인 총 21점에는 그가 탐색해 온 미학적 세계의 비경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 개인전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요 작품 전체를 조망할 기회는 없었다. 작가는 이 비경의 스펙트럼을 완성하기 위해 팔려간 작품도 대여했다. 말하자면 그는 작심하고 이 전시를 기획했다. 왜일까? 

집단적 트라우마의 흔적 

1997년 IMF구제금융의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성장 정책의 폐해를 몸으로 앓아야 했다. 급진자본주의의 링에서 타이슨의 핵펀치로 날아든 구조조정의 여파는 화이트칼라의 노동체제는 물론이요, 블랙칼라의 전문직 노동체계까지 붕괴시켰다. 강퍅한 삶의 체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육탄전' 밖에 없었다. 시퍼렇게 멍든 핏빛 상처의 좀비 얼굴로 삶의 파국을 엿보이는 <상처>(1998)나, 사시미칼을 움켜쥔 용문신 남자의 활활 거리는 외기로 가득한 <붉은 방>(1999)은 '산몸'의 비극적 절망과 극단적 분노를 표출한다. 그렇다면 IMF가 끝난 뒤의 한국사회는 어땠을까? <상처>의 주인공이 목 잘린 남자의 피투성이 머리를 들고 있는 <밤의 질주>(2001)와 용(문신) 남자가 정육점의 살코기로 내걸린 <피에타>(2002)는 그 절망과 분노가 사이코패스의 현실로 돌변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김성룡의 작품은 현실을 성찰한 비현실/초현실의 실체들이다. <상처>나 <붉은 방>처럼 그의 많은 작품에는 알 수 없는 한 개인이 등장하고, 그는 트라우마의 뼈아픈 흔적을 집요하게 그렸다.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건을 예술적 사건으로 전환시켜 집단적 트라우마에 쳐 박힌 무수한 몫없는 자의 영혼을 실체화 하는 일이기도 했다. 몫 없는 자들의 실체, 바로 그것이 그가 밝히고자 하는 후경의 리얼리즘일지 모른다. 

가령 <숲의 정령>(2007)을 보자. 숲에 있는 한 사람이 한 손에는 비둘기를 안고, 다른 손은 어떤 사건의 발단을 일으키려는 손짓을 하고 있다. 작가에게 작품은(혹은 한 장면은) 하나의 상황을 전제하는 하나의 세계요, 그 세계의 창이다. '한 사람-한 장면-한 세계-창'이 작품의 구성이란 얘기다. 그리고 그는 '창'으로 후경만이 가진 영적 세계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예컨대 그는 무수한 선에 덧대듯 색을 얇게 덧칠한다. 옹색한 재현보다는 작품 속 장면을 '시각적 사건'으로 전환하는 데 색을 쓴다. 색의 현현으로 장면은 구체성을 띠며 후경의 리얼리티를 발산하기 시작한다. '추상적 배경-구체적 장소-사건/상황-분위기'로 비로소 현실 너머의 후경이 실체화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확하게 그 장면의 사건이 지시하는 미학적 개념을 해석할 수는 없다. 그의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우리는 위의 해석적 체계로 그의 작품이 지시하는 미학적 상징에 근접할 수 있다. 대체로 그 은유의 실체는 우리 삶의 현실계를 지탱하는 초현실계의 리얼리티이니까. 김성룡의 작품이 이룬 아픈 후경으로서의 그 리얼리티를 보자. 마술적 판타지의 신화적 세계가 펼쳐지는 꿈과 전경의 삶을 좌우지 하는/한다고 믿는 토속적 샤머니즘, 깨어서 인식할 수 있는 자아의 밑 구덩이에 처박혀 간혹 놀라운 직관과 인지능력을 발휘하는 초자아, 몸에 깃들어서 몸이 하는 일의 역사를 응시하는 마음,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고선 신령함과 넋, 그런 넋의 환생을 관장하는 신령함의 서사, 그 서사가 다시 몸을 타고 올라가 쏟아내는 방언들, 그리고 신명의 공동체가 느리게 형성하고 오래도록 즐겼던 문화의 이미지들, 이미지의 은유들, 은유의 뼈들. 바로 그것들이 후경을 이루는 DNA요, 리얼리티다. 

2013.3 [경기일보] [그림 읽어주는 남자] 김성룡의 반 고흐의 숲

반 고흐의 숲, 종이에 유성볼펜 색연필 아크릴릭, 170 × 120 ㎝, 2008

|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3월의 끝자락, 폭설이 이어지는 괴이한 날들이지만 그렇다고 봄의 정령이 다시 잠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젯밤 뉴스에서 매화꽃 뒤덮은 흰 눈꽃을 보았다. 여린 꽃잎들이 눈꽃의 무게를 견디는 순간은 경이로웠다. 3월의 때늦은 눈꽃을 과잉춘설(過剩春雪)이라고 하나, 지난주에는 북설남우(北雪南雨)였다. 매서운 눈보라가 영동지역을 몰아쳤고 남쪽으로는 찬비가 내렸으니. 

숲의 시간을 따라 봄꽃이 터지는 일을 자연의 이치로만 볼 수도 있으나, 상징계로 해석하면 그것은 숲의 영성이 깨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겨울 동안 숲의 가장 깊숙한 곳에 활생(活生)의 기운을 묻어두었던 정령들이 노란 활력을 틔우는 순간들인 것이다. 김성룡의 ‘반 고흐의 숲’은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화가 반 고흐를 통해 숲의 영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성룡이 20년 넘게 주목해 온 것은 격동의 근대화와 그 정치성이 야기한 개인의 상처 즉 트라우마(trauma)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에는 한 개인의 초상들이 등장하며 그 인물들에는 ‘흰 그늘’ 같은 것이 서려있다. 흰 그늘은 인간의 영성을 성숙시키는 카오스적 단련기제다. 공포와 환희, 죽음과 삶, 어둠과 빛처럼 서로 배치된 것들이 이종 교합하듯 한데 어울려야만 발아하는 것이 흰 그늘이다. 김성룡의 흰 그늘은 공포·죽음·어둠의 색채들로 구성된 회화들이 환희·삶·빛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어떤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 의지는 현실이라는 리얼리티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부조리한 세계의 찰나를 붙잡으려는 작가의 세계인식과 다르지 않다.  

그런 그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독특한 지점을 형성하고 있는데, 1980년대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새롭게 실험하고, 2000년대에는 현실과 비현실,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리얼리즘의 미학을 독자적 경지로 끌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은 쉽게 판타지의 영역으로 휩쓸리지 않는 그의 견고한 미학적 정치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미학적 정치성은 여전히 ‘현실’이라는 아주 강력한 리얼리티이다. 

이 작품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짙게 배어있다. 그의 경외심은 불상의 광배나 아우라에서 볼 수 있는 외기(外氣)의 색채에서 두드러진다. 그 외기는 단지 한 인물의 기운 같은 것이 아니라 ‘그’를 자연과 이어지고 통하게 하는 ‘일여(一如)’의 어떤 것이다. 그 일여는 항상 우리 앞에 현현하는 보편이 아니다. 그것은 한 찰나에 엿 보이는 자연의 영적 순간들이다. 봄이 오는 순간들처럼. 

2009 박영택 미술평론가

섬세하고 예민한, 더러는 신경질적인 그 날카로운 볼펜 선의 치밀하고 빼곡한 밀집을 통해 우리 역사와 사회의 아픔과 피비린내 나는 생채기와 얼룩을 또한 민감한 실존 의식의 내상을 우울하게 그려내는 김성룡의 작업에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에 의해 구겨진, 찢어진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지독스런, 치열한 실존적, 심리적 자존적 세계는 우리 시대의 보기 드문 예술가 상을 떠올려 주는 듯하다.

2007.12 [컬처뉴스] 지독한 정신, 열 개의 꽃

숲으로 보다, 종이에 혼합재료, 125 × 115 cm, 2007

[연말특집 장르결산 ③] 열 개의 작품으로 본 2007년 한국미술 | 김종길 미술평론가

(현재 뉴스컬처 웹페이지는 폐간되어 원문보기가 불가능한 상태다. 관련 글 중에 김성룡 작가 관련 내용만 발췌하여 수록한다)

단일적 재료를 통한 지독한 그리기의 회복, 김성룡 《보이지 않는 신체》전 

김성룡은 근대 이후의 옹이진 역사, 그 피비린내 나는 생채기와 접신하여 공수의 언어로 회화의 면을 채우고 서사를 구성했다. 그 안에서, 삶을 유린당한 세상은 황폐하기 그지없고, 생명 있는 것들은 마치 알 수 없는 죽음에 전염된 듯 말라붙었다. 맨 얼굴 뒤의 잔혹한 인간의 폭력성이 공기에 녹아 떠다니고 있다. 도처에 응고된 핏발이 뿌려져 있고, 분노한 신령의 소리가 땅에 요동친다.

작가는 1980년대의 한 기억으로부터 ‘내림’의 신기를 받은 듯하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1984년 안개군단이 밀려오는 저물 무렵의 해안가. 찢어진 옷, 검은 가슴, 입술에는 막을 수 없는 피가 흐르고. 겨울 폭풍이 지나간 선창에는 목선들이 엎어져 있고, 육수 같은 안개 속에서 누이의 흰 얼굴이 혼령인 듯 올랐다. 푸른 실핏줄이 드러난 누이의 얼굴이 안개에 젖어 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개인사적 사건이 아니다. 1980년대라고 하는 시대의 ‘누이’에 대한 공수의 기록이다. 그리하여 그는 부산시 서면의 한 극장을 빌려 5,18 넋을 위무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넋의 굿판이었다. <조선귀신>과 <근대 수난사> 그리고 일명 ‘미친년’ 연작을 그린 것도 이때다. 그러나 이 그림들은 작품이 아니다. 그에게로 온 넋이 풀어놓은 슬픈 ‘애린’의 초상이다. 김성룡은 100여 점의 작품을 불사르고 나서야 그 넋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때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점례누님>(1990), <봄날>(1988), <새벽>(1991) 등이다. 

1990년 초반, 부산 출신의 작가들이 모여 '해빙'이란 그룹을 결성했다. 20대 후반이 주축이 된 젊은 작가들은 앞선 선배들의 현실 비판적 미술을 지향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선배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순화된 서정성에 대한 토론, 다양한 재료와 매체 활용, 다층적 경향의 새로운 시도 등을 적극 수용하고 실험했다. 리얼리즘, 마술적 사실주의, 환상적 초현실주의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김성룡은 이에 심취했다. <봄날>이 시대의 광기를 핏빛 무덤과 ‘미친년’의 강한 대비 속에서 의미를 생산했다면, <새벽>은 리얼리티가 초현실적 풍경으로 육화되어 더욱 강한 리얼리티로 부활하는 모습이다. 그러한 형식 개념과 주제, 재질로서의 볼펜이 만나 심원한 상징으로 떠오른 작품이 <청산에 눕다>(1992)이다. 푸른 산, 맑은 물, 금수강산 저 아름다운 대지에 거대한 소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소의 몸은 대지를 뒤덮고, 피는 강으로 흘러든다. 소등에 탄 민중 또한 퀭한 눈빛을 토하고 있다. 그런데 청산은 어찌 이리 푸르고 고요한가. 산의 계곡을 넘실거리는 저 신령함은 어디로 가는가. 작가는 이곳이 무릉인가, 도원인가, 지옥인가 묻는다. 시대의 건널목에 암초당한 한 마리 소가 죽어 있다. 그래서일까, 1990년 후반 그는 다시 신병을 앓듯 거센 몸살로 신열이 들끓었다. “외진 곳으로 만행하듯 떠돌았어요. 그러다 돌연 어떤 것들과 마주쳤죠. 앞도 뒤도 스승도 없고, 막막한 어둠 속에서 ‘벌레’가 떡하니 서 있었어요. 무섭고 두려웠죠.” 그의 고백에는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묻어 있다. 어느 날 아침,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로 변한 것을 깨달게 된 「변신」의 그레고르처럼 그는 자신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불현듯 벌레와 만나야 했다. 불교의 고행과 깨달음의 이치에 빠져든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존재인 벌레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벌레는 삶의 어두운 저편에 숨어 있는 ‘폭력’ ‘신비’ ‘정화’의 표정을 날것으로 보여주었다.

2000년 이후 작업은 그러한 ‘날것의 표정’을 증거한다. <war>, <untitled>, <한용운>이 그 대표적 케이스다. <war>는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 병사를 그린 것이다. 공격 본능에 길들여진 살인병기로서의 인간, 그 악마성의 실체를 붙잡아낸 것이다. 이것은 잔인한 폭력의 벌레다. 작가는 그림으로 붙잡아낼 때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이제 그는 당당히 벌레의 실체를 그림 속에 잡아넣는다. <untitled>는 부산의 장안사에서 만난 여고생(벌레)이다. 사찰 옆에는 대나무 숲이 있다. 숲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바리케이드 앞에서 그는 이 벌레와 마주쳤다. 삶과 죽음의 경계인 ‘중의’ 상태의 여고생이 교복을 입고 나타났는데, 한쪽 팔이 머신machine이다. 이 공간은 그로 인해 몽환적 상태로 변하고 기묘한 ‘징후’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발 부분은 옅게 그려져 허공에 떠 있는 것인지, 현실계인지 모호하다. 김성룡은 폭력의 징후가 다른 나라, 국가 권력에서 개인에게로 전이된 현재의 이면을 전사한다. 하지만 <한용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세계는 지금 여기의 ‘실재’에서 조금씩 벗어나 사유의 ‘실제’로 깊어지고 있다. <공의 뜰>은 그 자체가 공안이다.     

김성룡은 최근 전시들과 《보이지 않는 신체》(수가화랑, 10.31~11.25)를 통해 21세기 한국 회화사에 선홍빛 자국을 새겨 놓았다. 어떠한 외적 풍향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회화탑을 쌓아 올린 그의 작품들이 이를 입증한다. 

1992.8 [월간미술] 특집 역사적 모티브와 90년대 회화 | 강성원

 김성룡의 작품은 상황화된 사물과 풍경을 배경으로 구체적 개인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개인은 거의 유령화되다시피한 혼백만으로 존재한다. 그 개인은 서구적 의미의 시민적 개인이 아니라, 현재의 한국인들의 의식의 근저가 되고 있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는 개인이다. 
 혼백으로만 남아 역사를 전하는 그의 작품들의 주인공은 강산의 이곳 저곳, 마당 뒤뜰, 느릅나무 밑, 지붕 위, 도심 공간의 곳곳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실체를 증언한다. 김성룡은 기존의 회화의 역사 취급 방식이 개인을 배제한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나 총체적 역사를 사건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방법과는 달리, 사물 속에 실체화된 한국 근현대사를 사물의 의식 내용과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민족 개개인의 자기정체성의 모양들을 통해 역사해석의 신화적 형상력을 얻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