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 person

※ 전시와 관련된 작가의 글은 Artist's note 페이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개관기념전 <공성훈, 김성룡 2인전>

2012.10.12 ~ 11.17 
GALLERY Moon & Park(부산)
※ 아래 도판은 전시 도록에 수록된 내용이며, 도록에 수록된 순서대로 게시했다.

찰나를 엿보는, 두 시각예술가의 영적 회화록-공성훈과 김성룡의 화필난봉가 서설 
| 김종길 미술평론가

◼︎공성훈, 붓으로 추는 굿판

공성훈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마주한 것은 올해 3월 oci미술관이다. 전관을 채운 그의 전시 주제는 '바다'였다. 바다 그림들은 어두웠으나 그것을 보는 나의 '몸각'은 낱낱이 소름이었다. 그림의 색들은 푸르렀으나 그것을 보는 나의 눈은 시퍼렇게 멍들었다. 1층에서 2층으로 다시 2층에서 3층으로 전시장을 둘러보는 동안 그의 풍경은 간헐적으로 나의 신체를 공격해 들어왔다. 바다였는지 바다의 색이었는지 아니면 그 그림들 사이를 떠도는 낮은 바람이었는지, 그것들은 내 눈의 안막을 넘어와 심연의 창살을 뒤흔들었다. 전시장에 내걸린 작품들은 그렇게 내 안의 것들을 뒤흔들어서 출렁거렸다. 나를 채운 바다는 마치 거대한 항해의 한 복판에서 크게 넘실거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전시장을 빠져 나오자 그 모든 순간들은 까마득한 찰나였다.

그림들이 사실적 재현이든 비현실과 초현실의 심상적 풍경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는 그의 그림들에서 까닭 모를 영적 찰나를 체험했다. 그리고 내가 체험한 바로 그것이 화가 공성훈이 드러내고자 하는 회화적 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근대 이후, 회화를 비롯한 여타의 미술 분야는 이성의 증폭에 따른 개념적 성장에 몰두했다. 그런 맥락에서 미술은 미술의 영성이나 천재성 따위를 매몰차게 상실 시켰다. 문제는 작가의 영적 체험이나 천재성이 과학과 이성에 반하는 반근대적 표상이라고 할지라도 삶의 현실에 직면해 있는 영성과 천재성조차 상실시키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일 테다. 작가와 현실 간의 감각의 체계조차 과학과 이성이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21세기, 최첨단 과학의 현실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계는 비현실과 초현실의 판타지를 보여주기 위해 과학을 동원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과학은 삶의 많은 부분을 해석하지도 증거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삶의 진실은 공성훈의 회화에서처럼 그것이 예술이 되었을 때 더 생생했다. 흥미롭게도 인류는 더 많은 영적 체험을 위해 영화관을 찾고 영화는 가장 진보한 과학에 의해 탄생하고 있으며, 그 영화의 세목들은 예술가의 영감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성훈의 회화적 진실은 풍경의 ‘어스름’과 ‘녘’에 집중했다. 그 시간은 현실과 비현실/초현실의 경계이고 밝음과 어둠의 사이다. 세세하게 드러난 것들이 한 덩어리로 숨어드는 시간이어서 여명의 꼬리가 길어질 뿐 시나브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시간들이다. 또한 경계와 사이에 속한 시간이기에 짧게 명멸하는 명징이 그 순간들의 찰나적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그 순간 순간들은 영원과 같아서 눈을 깜박이지 않으면 흐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빠른 필체로 풍경을 그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일 터이다. 그는 보는 만큼의 찰나를 영원으로 유지하는 붓 그림을 펼친다. 언 듯 보면 매우 사실적인 그림들이지만 가까이 보면 붓바람, 붓춤의 휘모리로 정신이 없다. 붓으로 추는 굿판이라 해야 할까?

공성훈의 회화는 자연의 거대 환상이나 숭고 따위가 아니라 가장 현실다운 현실의 초상과 직면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념의 풍경들을 지우고 그 풍경의 진실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공성훈의 풍경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순간순간 상실한 일상일 따름이다. 삶은 언제나 판타지로 가득했고 비현실과 초현실로 충만했으며 숭고했다.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시간들이 길어졌을 따름이다. 사실 그 동안 회화는 ‘회화론’에 갇혔고 미술은 미학에 갇혀있었잖은가! 공성훈의 풍경을 따라 현실로 직립해 들어가 볼 일이다. 

◼︎김성룡, 신령한 존재들의 찰나

김성룡은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20여년 동안 한국사회의 이면에 가려진 상처받은 자아의 실체를 지독한 그리기를 통해 탐색해 온 중견 작가다. 그가 주목해 온 것은 격동의 근대화 혹은 현대화의 정치성이 야기한 개인의 상처 득 트라우마(trauma)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에는 한 개인의 초상들이 등장하며 그 인물들은 어김없이 김지하 미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흰 그늘의 미학’ 같은 것이 서려있다. 흰 그늘은 인간의 영성을 성숙시키는 카오스적 단련 기제다. 슬픔과 기쁨, 공포와 환희, 죽음과 삶, 어둠과 빛처럼 서로 배치된 것들이 이종 교합 하듯 한데 어울려야만 발아하는 것이 흰 그늘이다. 김성룡의 흰 그늘은 슬픔・환희・삶・빛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어떤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 의지는 현실이라는 리얼리티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부조리한 세계의 찰나를 붙잡으려는 작가의 세계인식과 다르지 않다. 

김성룡은 1980년대 후반부터 부산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90년대 초반에는 그 지역출신 작가들이 모여 결성한 ‘해빙’이란 그룹에 참여했다. 민중 미술계 선배 세대들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작가적 성취를 지향했던 이 그룹의 모토는 현재 김성룡 작가의 작품에서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1990년대 호반에 제작된 <봄날>과 <새벽>, <청산에 눕다>의 작품들이 내포하고 있었던 역사적 관점에서의 현실 비판을 유지하되 보다 선명한 당대성을 획득하고 있다. 1980년대, 한국 현대사에 그어진 ‘오월 광주’는 현실 미학을 초월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김성룡은 이 역사적 사건을 예술적 사건으로 전환시켜 집단적 트라우마에 가린 개인의 상처를 묘파해 냈다. 그는 놀랍도록 예리한 필체로 우울한 대지의 풍경과 인물들의 표정을 새겨 넣음으로써 그 시대의 ‘역사성’을 미학적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그가 현재까지도 주된 방법론으로 활용하고 있는 ‘볼펜 채색기법’은 그런 느낌을 전유하는 매우 효과적인 텍스추어(texture)다. 

최근에 전시하는 작품들은 2000년대 이후 새롭게 관심을 가진 주제들이다. 그동안 그가 줄기차게 던졌던 화두는 ‘인간의 폭력’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제 그는 자연으로 눈을 돌려 그 폭력의 가면을 벗겨낸다. 

심연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연에 관한 명상적 작품이 있는가 하면, 휴전의 내공으로 가장 아름답게 성장했으나 슬픈 영혼들이 떠도는 DMZ의 초상도 있고, 더 이상 자신들의 삶터를 내어 줄 수 없어 이미 가파른 절벽에 다다른 동물들도 보인다. 이 동물들은 인간이 상실한 자연의 순수성 혹은 영성을 간직한 신령한 존재들이다. 이제 그의 작품들은 현대화의 정치성이 아니라 미학적 정치성으로 나아가 ‘현대화’ 혹은 ‘문명화’라고 하는 근원적 모순을 파고들고 있다. 하여 그의 작품들은 이전과 달리 훨씬 컬러풀해 졌고, 그만큼 화면 속 대상들의 에너지도 커졌다. 기쁨・환희・삶・빛의 세계가 넘실거린다. 반면 그것들의 이면에는 그 반대의 정서가 깊숙이 내장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독특한 지점을 형성하고 있다. 1980년대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1990년대를 거치면서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새롭게 실험하고, 2000년대에는 현실과 비현실,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리얼리즙의 미학을 독자적 경지로 끌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은 쉽게 판타지의 영역으로 휩쓸리지 않는 그의 견고한 미학적 정치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미학적 정치성은 여전히 ‘현실’이라는 아주 강력한 리얼리티이다. 

이번에 전시하는 인물들에서는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짙게 배어있다. 그의 경외는 불상의 광배나 아우라에서 볼 수 있는 외기의 색채에서 두드러진다. 그 외기는 단지 한 인물의 기운 같은 것이 아니라 ‘그’를 자연과 이어지고 통하게 하는 ‘일여’의 어떤 것이다. 그 일여는 항상 우리 앞에 현현하는 보편이 아니다. 그것은 한 찰나에 엿 보이는 자연의 영적 순간들이다. 

Andreas Lau, 김성룡, 성유진 <현대 작가 3인展>

2012.6.19 ~ 7.25 
GALLERY Moon & Park(부산)